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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 산

한라산1950m

바람보다 빨리 눕고 먼저 일어서는 산

 

 ◇ 석양에 물든 백록담 화구벽. 백록담 폭발을 끝으로 이 섬의 대규모 화산활동이 일단락 된 것이

대략 2만 5천년 전이다. 한라산은 한반도 지질 역사로 보면 젊은 산이다. 사진 김선미.

 

산이 크면 아픔도 큰 게 우리 역사였다.
지리산이 그랬듯이 한라산 역시 우리 근현대사의 날이 선 상징이다.
함부로 그 상처를 자로 잴 수 없지만 한라산은 지리산보다 높고, 아픔은 깊다. 단지 지리산보다 해발 고도가 35m 높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반쪽 땅에서 가장 높은 산이 발을 드리운 곳은 눈물로 울렁이는 제주바다이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는 그 바다가 오랜 세월 감옥이었다. 뭍에 사는 이들이 그리워하는 수평선이 섬 사람들에겐 헤엄쳐 건너고 싶은 거대한 울이다. 눈만 뜨면 눈썹 위에 수평선이 걸리는 사람들은 평생 그걸 넘어가는 게 꿈이었다.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를 찾은 대통령은 4·3사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첫 공식 사과를 했다.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토벌 작전에 의해 이념과 상관없이 쓰러진 이가 섬사람들 10명 가운데 한 명 꼴이었다. 당시 군경은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모두 적성지역으로 분류하고 소개령에 나섰으니, 그들에게 한라산은 송두리째 불태워버려도 시원치 않은 빨갱이들의 소굴이었다. 화산폭발 이후 한라산이 이토록 뜨거웠던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1954년 9월 21일, 물 한 방울 거죽에 남기기 않는 푸석푸석한 제주의 마른 땅들이 섬 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흥건히 젖은 후에야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풀렸다. 이제 이 산길을 가로막는 총구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을 막는 것은 뜨거운 이념의 화염이 아니라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도로에 내려진 대설주의보의 서늘함 뿐이다.
겨울 한라산으로, 허벅지까지 빠져드는 깊은 눈밭으로 시름을 묻으러 가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걸어도 끝이 없는 눈밭에서 기억해야 한다. 매서운 바람을 타고 한라산을 올라온 제주바다가 흩뿌리는 눈은 섬사람들의 오랜 눈물이었음을.

화산섬에서 솟구친 한반도의 방패막이

한라산의 이력서를 쓰자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약 1백 20만 년 전, 이 땅의 남쪽 끝자락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아직 제주 섬은 세상에 없었다.
북쪽 백두산에서 용솟음친 대륙의 기운에 화답이라도 하듯 남쪽 끝에서 끓어오르던 거대한 용암덩어리.
육지와 한 몸이었을 그 땅은 온몸으로 불꽃을 뿜어 올리며 들끓었을 것이다. 그것은 훗날 대륙과 대양을 잇는 한반도의 출발을 알리는 봉홧불이었을지도 모른다.
화산 폭발이 성장을 위한 뜨거운 진통이라면 한라산은 네 번이나 큰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처음 두 번에 걸친 폭발이 펑퍼짐한 용암대지로 굳어 기반을 다졌고, 섬이 제 모습을 갖춘 다음에는 그간의 응축된 힘을 모아 한가운데서 크게 솟구쳤다. 한라산은 저 혼자 산이 된 것은 아니다. 산을 만들고 남은 기운들로는 올망졸망 오름들을 쏟아냈다.
백록담 폭발을 끝으로 모든 통과의례를 마친 것이 대략 2만 5천년 전이다. 지구의 역사로 보면 젊디젊은 산인 셈이다. 그 뒤에도 종종 용트림을 해 고려 목종 때인 1002년과 1007년에도 제주 섬이 끓어올랐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근 1천년 동안 화산섬은 잠들어 있다. 이제 섬을 깨우는 것은 용암보다 뜨거운 사람의 역사다.
한라산 젊은 산마루는 한반도로 향하는 태평양의 강한 바람을 막는 오랜 방패막이였다. 이 땅을 향하던 무수한 세월의 비바람이 한라산 산마루에 걸려 부서지거나 방향을 바꾸었다. 한반도 남쪽 기름진 곡창지대를 지킨 것이 한라산이고, 그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산 이들이 제주사람들이다.
섬 사람들의 첫 나라, 탐라를 세웠다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는 한라산의 아들들답게 땅에서 솟구쳐 올랐다. 조상들이 솟구쳐 오른 땅은 화산이 만든 푸석하고 찰기 하나 없는 돌밭이다.
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술술 물이 빠져 버리고 금세 들떠 일어나는 메마른 땅. 그곳에 지천으로 널린 돌무더기를 파헤쳐 겨우 씨앗이라도 뿌릴라치면 미친 듯 불어 닥치는 바람이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돌과 바람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어떤 생명도 온전히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섬. 그래서 사람들은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한겨울에도 푸른빛 출렁이는 제주 들판에 구불구불 이어지는 검은 돌담은 척박한 땅 위에 써내려간 섬사람들의 역사다. 밭과 집 둘레에, 말과 돼지를 가두는 우리와 사람들이 지나는 모든 거리에, 그리고 죽어서 누운 무덤가에까지 산담을 둘렀다. 그렇게 이어진 제주 돌담은 만리장성보다 긴 9천7백리에 이른다. 사람들은 이를 ‘흑룡만리’라고 부른다.
얼핏 모난 돌을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듯 엉성해 보이는 검은 돌담은 돌챙이라는 이름 없는 기술자들이 하나하나 깎고 다듬어 단단하게 아귀를 맞춘 작품이다.
구멍 뚫린 현무암 덩어리들이 얼기설기 포개져 쌓은 담 역시 숭숭 구멍이 나, 대체 무슨 바람을 막을까 싶은 담이다. 그러나 제주의 담은 바람과 싸우지 않는다.
제 몸의 구멍으로 바람을 통과시켜 거대한 힘을 잘게 부수는 것뿐이다. 바람은 돌담 속에서만 부서진 게 아니다. 돌 속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강인함 앞에 성난 기운을 누그러뜨렸다.
섬사람들이 바람을 몰고 오는 대자연의 생명력 앞에 먼저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 평생을 돌과 함께 사는 제주 사람들은 죽어서도 산담을 두른 묘지에 누웠다.

 

 

누구도 바람과 싸우지 않는다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경배하는 사람들. 그들이 온 마음으로 섬기기를 다한 신들의 고향이 모두 한라산이다. 1만8천이나 되는 신들이 산다는 제주에서도 가장 신령한 곳 한라산은 뭍사람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예부터 봉래(금강)·방장(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불린 영주산이 한라산이다.
신선의 땅에 나는 불로초를 찾아 바다 건너 중국에서까지 찾아왔다. 남의 땅 진귀한 약초들을 캐가면서 배짱 좋게 경치 좋은 바위마다 낙서까지 남긴 진시황의 부하 서불 일행이 대표적이다. 그는 서귀포시 정방폭포 옆 바위에도 서불과차(徐市過此)란 흔적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 징표를 신령한 부적처럼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불이 서쪽나라로 돌아간 곳’이란 뜻으로 서귀포라 불렀다. 지금 같으면 불법 채취로 출국금지를 당했겠지만, 그는 한라산의 신령함을 선전한 최고의 홍보대사가 된 셈이다. 서불 일행이 채취한 것은 한라산 백록담 주변에 자라는 시로미 열매다.
“한라산 허리엔 시러미 익은숭 만숭 서귀포 해녀는 바다에 든숭 만숭 제주야 한라산 고사리 맛도 좋고 좋고…”
제주민요 오돌또기에도 등장하는 이 열매는 대표적인 한라산의 자생식물이다. 시로미뿐이 아니다. 한라산 하나에 우리나라 전체 식물종의 50% 가량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전에 천연기념물로 먼저 지정된 산이다.
바닷가에 사는 문주란, 비양나무부터 해발 1400m 이상에 뿌리내린 눈향나무, 시로미처럼 아고산대 식물까지…. 모두가 바다에 갇혀 있는 섬사람들에게 주는 축복이다. 남쪽바다 한가운데 솟은 산마루에 서늘한 대륙의 기운을 머리띠처럼 두르고 저 멀리 백두와 한라가 한 뿌리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해서 속옷조차 갖춰 입지 못했던 거인 할망 설문대가 찢어진 치마폭으로 흙을 퍼다 만들었다는 제주섬과 한라산. 500명의 아들들을 먹이기 위해 죽을 끓이다, 결국 그 속에 빠져 제 몸으로 자식의 배를 불린 제주의 어머니.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던 그의 약속이 고작 명주 한 필이 모자라 좌절됐다는 허망한 옛이야기는 무슨 뜻일까.
뭍사람은 한라산에 올라 짐작만 해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이라지만 산에 올라 발밑에 일렁이는 제주바다를 내려다보면 안다. 한라산이 그대로 섬인 것을. 산이 섬이고 섬이 그대로 산이다.
배를 타고 나간 아들은 감감 무소식이고 며느리는 젖먹이 두고 물질하러 바다밭으로 나가고 허리 굽은 늙은이도 쉴 염치가 없는 고단한 땅, 애기구덕에 어린 손주 누이고 돌밭에서 한나절을 보냈을 할망들이 들려주었을 법한 설문대의 전설. 섬은 섬이다.
그러니 뭍을 향한 알량한 그리움일랑 매정하게 잘라버리라는 뜻 아니었을까. 섬 안에 생을 바로 보고 바지런히 살 궁리부터 하라는 단도리가 아니었을까. 고려에 편입되기 전 바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으로 표표하게 떠 있던 해상왕국 탐라인의 자존심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이웃 나라 수군들이 두려워하던 덕판배로 바다를 주름잡던 탐라의 뱃사람들, 사내와 아낙 구분 없이 바람과 한 몸이 되어 온몸으로 바다를 읽을 줄 알던 옹골찬 섬 사람들.
그들이 탐라왕국에서 제주라는 변방의 섬으로 내몰려 말이나 내려 보내고, 사형을 면한 죄인들의 아득한 유배지로 역사의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 그들에게 변함이 없던 것은 한라산뿐이었다.

◇ 섬 어디를 가더라도 보이는 한라산은 섬사람들에겐 삶의 등대이자 신앙이었다.

사진은 영실 분화구(왼쪽)와 한라산 정상. 사진 김선미.

 

 

“백록담에 부정한 소리 민 어남 질 일른다”

돌밭을 매다가 허리를 펴고 일어설 때도 바다 대신 등 뒤에 산을 보았고, 저승길을 오락가락한다는 자맥질 끝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잠녀들의 기나긴 숨비소리가 향하는 곳도 한라산이었다. 바다로 나간 아비들은 그 산을 등대 삼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산의 물리적 높이란 별 의미가 없다.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터가 1901년(이재수의 난이 있던 해이다) 한라산에 올라 이 나라 사람들이 구경도 못한 해괴한 기계로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 1950m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산의 높이를 ‘은하수를 끌어당길 만하다(雲漢 拏引)’고 믿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눈에 걸리는 산이지만 삶이 주린 섬 사람들에게 별처럼 아득히 높고 멀었다.
그 산을 유람 삼아 오르는 일일랑 뭍에서 내려온 ‘나리’들뿐이고, 정작 사람들은 “백록담에 부정한 소리 민 어남 질 일른다(백록담 가서 부정한 소리하면 안개 껴서 길 잃는다)”며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갔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을 때가 있고, 눈과 안개에 길을 잃는 일은 허다했다.
지금도 제주바다를 유람하던 가벼운 몸으로 준비 없이 한라산에 오른 뭍사람들은 호되게 산에 놀란다.
윗세오름 휴게소 관리인 오동진씨가 눈보라치는 밤 화장실에 갔다가 코앞에 숙소를 두고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박했다는 이야기를 허투루 들을 수가 없다. 그는 8000m 고봉을 오르내린 전문산악인이다.
한라산 등산로에 해외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장대에 매단 표식기가 20m 간격으로 줄지어 길안내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비행기 창밖으로 한라산을 발밑에 내려다보며 떠나는 뭍사람은 생각한다. 이 섬은 우리 땅의 전위대였구나. 남쪽바다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대양의 비바람을 맞아왔듯 새로운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대신 앓았구나.
가슴이 뻥뻥 뚫려 풀처럼 가벼운 돌멩이들이 만든 섬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빨리 울고서 결국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구나.
서울로 가는 하늘에서 한라산이란 거대한 물허벅에서 퍼 올린 삼다수 맑은 물 한 잔을 다 들이키기도 전에 그리운 그 섬이.

 

출처 : 월간[마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