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 라 산

한국 등산사 초록 [제주편 1]

한국 등산사 초록 6·25 이후 60년대 산악운동 [제주편 1]
 
제주는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의 한라산 등산사

제주는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다. 한라산 등반은 여권과 비자만 없을 뿐, 해외(海外)등반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육지 산 1회 등반 비용은 적게는 다섯 번, 많게는 열 번의 한라산 등반비용과 같다. 그럼에도 한라산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육지 산악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미 한라산을 올랐거나 오르고자 하는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미미한 편이다.


▲ 1935년 이즈미 세이치씨가 촬영한 산촌사람.1935~36년 한라산 동계 초등반 때 포터로 고용된 사람이다.
이 한국등산사 초록은 6·25 이후 60년대 산악운동사이지만, 제주편은 제주를 알고 한라산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먼저 1950년대 이전인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의 개괄적 등산사를 약술하고, 50~60년대 등산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시대적 상황을 배제하거나 기간에 얽매어 등산사의 앞과 뒤를 떼어내고 가운데 토막만 작성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다른 지역 등산사와는 다르게 작성되지만 어쩌면 제주도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며, 한라산 등반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지금까지 제주도 산악인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묻혀지기 전에 알려드리고자 그동안 찾았던 한라산에 대한 기록들과 기억을 더듬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제주 사람들의 고향을 알아보려면, 한라산을 어디서 보는 것이 제일 아름다우냐를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늘 보아온 장엄한 한라산이 각인되어 언제 보아도 그 모습이 아름답고 경외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한라산은 제주 사람들에게 어머니 품과 같이 포근하고, 생활터전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하늘같은 존재요, 성지로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 한라산 설피.제주산악회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필자 저서(산이 있기에 나 그곳에)1999.전시회도록에서 발췌.(좌측).1937년 9월16일 제주농고생들의 한라산 백록담 등정 사진(제주도교육박물관 소장).교복 차림에 각반을 두르고,저마다 팔뚝 굵기의 몽둥이를 들고 있다.제주도청 홈페이지의 '제주100년 사진'에서도 볼수 있음'
성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디 인간의 힘으로 되랴마는, 제주 산악인들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김종철씨와 타계하신 몇몇 산악동지들이 있었다면 최소한의 역사 작성이나마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신령이라던 김현우씨는 건강이 좋지 않고, 일부는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의논대상이라야 열 손가락 안이다. 그나마 김승택씨가 40여 년 전 일들을 새록새록 기억해내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한 가지 고민스러운 것은 한라산 등산사에 조난사고를 많이 기술해야하는 데 따른 부담감이다. 육지에서 와서 무사히 마치고 간 팀은 알 수 없어 기술하지 못하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조난사고에 대해서만 언급해야하니 글 쓰는 이의 마음은 착찹하기까지 하다. 한라산을 찾았다가 불귀의 객이 된 분들의 유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다시 한 번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은 제주도 산악운동사를 정리하여 산악 후배들에게 전하는 뜻 깊은 기회라 생각하며, 그들에게 완결편을 만들어내라는 과업을 부여하고자 한다.



태평양 큰 바람 막아주는 한반도 진산


▲ 영실.김용구씨(60대산회 회원)촬영(좌측).영실 존자암(제주도청 홈페이지 '제주100년 사진')사진설명에는 '1949년 남기섭씨가 찍은 것으로 이 초가암자는4.3이후에 지은 석이 분명하다'고 돼있으나 이는 맞지 않다. 4.3은 1948년4월3일 발생하여 한라산 출입을 금지시켰다가 1954년 9월21일 개방했다.1948년 10월17일에 해안가에서 5km이상 떨어진 중산간지역 주민들은 해안가로 소개령이 내려졌다.(우측)
제주도는 백록담을 대들보로 한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초가를 연상케 한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한라자운한가라인야(漢拏者雲漢可拏引也)라 하여 운한(雲漢·은하수)을 나인(拏引·끌어당김)할 만큼 높다는 뜻이다. 혹은 꼭대기가 평평하다(정상이 없다) 하여 두무악(頭無岳)이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부악(釜嶽), 원산(圓山), 진산(鎭山), 선산(仙山), 부라산(浮羅山), 혈망봉(穴望峰), 여장군(女將軍)이라 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신선들이 산다고 해서 영주산(瀛州山)이라 불리기도 하고, ‘하(하늘)’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여 ‘하늘산’이라 하는 이도 있다.


이름이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진산(鎭山)이란 보통 도읍의 뒤에 위치하여 그 지방을 편안하게 지켜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런 뜻에서 제주도는 한반도의 진산이다. 태평양에서 한반도쪽으로 불어오는 큰 바람을 한라산이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태풍의 길목에 우뚝 서서 내륙지방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 은혜로 말미암아 영남과 호남의 곡창지대가 만들어지고, 내륙지방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한다면 한라산을 대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하게 임해야할 것이다.


한라산(영주)은 금강산(봉래), 지리산(방장)과 더불어 우리 나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한라산은 범상한 이들은 근접하기를 꺼리는 신성시됐던 곳이기도 하며, 난대·온대·한대 및 고산지대의 식물을 한 몸에 지니고 있어 세계적인 식물보고로도 알려지고 있다. 우리 나라 전체 식물 4,000여 종의 절반인 1,80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니 얼마나 많은 식물종이 자생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배지이자 요새지


조선시대 제주도는 대표적 유배지였고, 일제시대 제주도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였다. 유배지로서의 제주도는 왕도 서울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절해고도로 2,000리, 2,500리, 3,000리를 초월한 상징적인 최악의 유배지요, 유배당한 유형인은 대체로 중대범인 국사범이나 정치범들이었다.


유형인들은 최악의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절대절명의 유배적 상황에 직면하고 체험한 것들을 글로 옮김으로써 소위 섬을 소재로 한 유배문학을 만들어냈다. 이들 유배문학 작품들은 한결같이 주옥같은 국문학 작품들이어서 오늘날까지도 국문학사적 위치와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죄질이 무거운 국사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언제 복권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방의 수령과 방백들이 전직 예우로 유형인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있어 유배생활을 불편없이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된 49명 중 일부는 제주도를 주옥같은 유배문학의 산실로 만들었는가 하면 후학들을 양성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 한라산 정상,김용구씨 촬영(좌측).한라산 원경,김용구씨 촬영
유배인 중에는 절도범이나 흉악범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근신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약간의 재주를 가졌다고 기고만장하여 집주인이 정성껏 지어준 밥이 맛없다고 멸시하는가 하면, 사노(私奴)를 시켜 육지 본가에서 반찬을 갖다 먹거나 첩을 데리고 와서 동거도 하고, 술장사나 육지 상인들의 거간꾼 노릇이나 하는 등 악영향을 끼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제주사람들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제주 사람들이 육지(본토)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면서 호칭 또한 ‘육지놈들’, ‘육짓것들’하고 부르는 주원인은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닌가 싶다.


또한, 일제 말에는 일본군이 소위 정예부대 관동군 10개 사단 20만 명을 한라산에 투입시켜 요소요소에 요새를 구축하고 동굴을 파서 연합군을 유인 격멸키 위한 주전장으로 무모하게 기도한 바 있다. 당시 일본은 제주도에 대륙 폭격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한라산 등반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세부자료들을 입수할 수 없어 자세히 기술하지 못하나, 한라산을 다용도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산을 한 바퀴 도는 하찌마께도로와 한라산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개발단도로, 일본군이 만들었던 인공동굴 등의 자료들은 누군가가 찾아내어 정리하고 보존해야할 아픈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한라산의 특이한 기록들


1002년(고려 목종 5년) 6월에 한라산에 4개의 구멍이 나면서 붉은 물이 솟아났다. 제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붉은 물이 솟아날 때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움직이며 우뢰 같은 소리가 나다가 7주야만에 맑아졌는데, 산에는 모든 초목이 없어지고 연기만 그 위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 한라산과 고사목,김용구씨 촬영
보고를 받은 왕은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조사케 했고, 전공지는 산 밑까지 직접 가서 그 모양을 그려 나라에 보고했다. 천 년 전의 기록이다. 달리 해석하면 한라산에 화산이 폭발해도 제주도가 완전히 초토화되지는 않을 것 같다. 조정에 보고할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한라산 높이는 이재수의 난이 발생했던 1901년 독일 지리학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가 측정했다. 1901년 5월 인천에서 현익호를 타고 제주를 방문한 겐테는 35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영실 코스로 한라산에 올라, 한라산 높이가 1,950m라고 측정한 지리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기록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40년 일본이 만든 제주도 지도에 오름 높이가 다르게 적힌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측량기술은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그는 1901년 중국을 경유해 한국에 도착, 미국인 센즈(Sends)를 만나 제주도에 대한 정보를 듣고 5월에 한라산을 등반했으므로, 이방인들에게도 한라산은 매력적인 산으로 비췄던 모양이다.


제주를 방문한 서양인 1호는 2002 월드컵 축구대표 감독 히딩크의 조국인 네덜란드인 하멜이다(1653년). 이재호 목사는 겐테 일행들에게 “한라산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원주민이건 이방인이건 아직까지 한라산에 올라갔다온 사람이 없고,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과 안정을 누군가가 깨뜨리는 날이면 산신령이 악천후와 흉작과 역병 등으로 반드시 이 섬을 응징할 것“이라고 말해 목사를 설득해야만 했다.



산악사 연대구분과 특징


제주도 산악사는 타 시도 등산사가 6·25를 기점으로 연대를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1948년 4월3일 발생한 4·3사건을 기준으로 해야 된다. 제주도 등산사는 크게 조선시대, 일제시대, 광복 후 4·3사건으로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내려진 등산사 단절 시기와 1954년 9월21일 입산금지령이 해제되고 산악단체가 만들어지는 산악운동의 태동기, 1961년 5월14일 산악단체가 만들어지고 나서의 활동기로 구분된다.


여기에 1960년대에 제기되어 오늘날까지 40여 년 이어져온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문제를 포함한 한라산 보호에 관한 내용과, 고 고상돈 산악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고상돈기념사업회 등 몇 가지를 첨언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의 한라산 등반


1960년대 이전 제주도 산악운동의 특징은 지역사회 행사와의 연계, 산악 안전계도 및 구조활동,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반대 등 산악보호 활동, 국내외 산악단체와의 합동등반 및 안내등반 등이라 할 수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민들이 신성시하는 성역으로 설문대할망, 백록담, 영실 전설 등 수 없이 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고, 선인들이 소와 말을 방목해서 키우거나 사냥을 하던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주인들이 한라산에 올랐던 기록이 전해지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래 전에 한라산을 등산했던 기록 대부분은 육지에서 귀양왔다가 올랐던 기록이나 목사로 부임하여 오른 후 작성한 기행문들이다.


1470년 이전에는 매년 음력 3월16일 백록담에서 한라산 산신제를 지냈었다. 백록담에서 지내는 산신제는 제물과 식량을 정상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동사자가 발생하는 등 많은 문제점이 대두됐다. 그 해 10월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묘단을 지금의 산천단(山川壇)에 설치해 산신제를 봉행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정상에서의 산신제는 없어지게 됐다. 가끔 기우제 등과 같은 특별한 경우는 있었다.


조선시대 정상을 등정한 기록 대부분은 관음사나 영실 코스로 오른 것이다. 1601년 9월 청음 김상헌(金尙憲) 선생은 영실(존자암) 코스로 한라산에 올라 산신에게 치제(致祭)를 올리면서 칭송하기를 ‘병이 없고 곡식이 잘 자라며 축산이 번창하고 읍(邑)이 편안한 것은 곧 한라산신의 덕이다.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름만 높았을 뿐, 한라산의 기이하고 수려함에는 따라오지 못하리라’라고 했다.


소덕유(익산)와 길운절(선산)이 제주에 들어와서 역적모의한 것을 처리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된 때다. 한라산 등산은 역적모의가 마무리되고 왕명으로 치제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지제교 이수록이 지어 올린 한라산 제문을 보면 ‘만력 29년 9월 을미 그믐 25일 기미에, 국왕은 성균관 전적 김상헌을 파견하여 한라산신령께 제사를 드리고 엎드려 아뢰옵니다’로 시작한다.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1873년 제주에 귀양왔다가 풀려나면서 1875년 3월27일 한라산을 등산하고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기록했다. 이 유산기에 보면 면암이 “한라산의 명승은 세상 어디서나 듣게 되고 여러 읍지(邑誌)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듣기에는 실제 가 본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하니 그것은 오르기 어려운 때문인가, 아니면 막아서 못 오르기 때문인가”라고 동행들에게 물어보니 “이 산은 뻗어간 둘레가 400리에 달하고 높이가 하늘과 지척에 있으며 5월에도 쌓인 눈이 녹지 않으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백록담은 신선들이 내려와 노는 곳으로 비록 개인 대낮에도 늘 흰 구름이 일어 이른바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하여 삼신산의 하나인데 어찌 뭇 사람들이 쉽게 유람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하니, 제주사람들이 한라산을 얼마나 신성시했는가를 말해준다. 이 때 같이 등산한 인원은 16명이었다.


면암의 한라산 등산은 상감의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난 때이지만, 제주인들과의 접촉은 ‘가시울타리를 치고 외부와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어명에 따른 귀양살이 중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유한라산기를 써도 괜찮았으니 말이다.


일제시대 기록으로는 1937년 9월28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한라산을 오르고 기록한 한라산등척기가 있다. 제주를 출발해 관음사를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영실과 어승생을 거쳐 제주로 하산했는데, 등반대 규모는 일본인과 포터들을 합쳐 80여 명의 대부대였다.


▲ 이즈미 세이치가 한라산 등반 후 작성한 보고서에 올린 제주도 지도(1940년)[좌측].1702년4월15일 제작한 조선시대 지도인 탐라순력도.제주병마수곤절제사 이형상 목사 재임 당시의 것으로 제주 유일의 화첩이다.원본은 제주도청 소장
기록을 보면, ‘제주도는 해발 200m 이하는 경작지대, 300m 이상은 조선시대 국립목장이 있던 곳으로 산장(山場)이라 부르는 산간지대, 600m 이상은 산림지대, 1,400m 이상은 관목지대이고, 식물수는 142과 1,317종 116변종이요, 그 중에서 78종 69변종이 특산인데, 이것은 백두산 490종, 금강산 772종, 일본 후지산 1,000종, 상근산(箱根山) 1,188종까지도 한라산에 못 미친다. 백록담은 못이 두 개로 되어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오래 전부터 한라산 식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고, 못이 두 개라는 것은 가물었던 시기에 등반했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민의 기록으로는 1937년 9월16일 제주농고 학생들이 한라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제복 차림에 각반을 하고, 저마다 팔뚝 굵기의 몽둥이를 들고 있다. 제주농고 학생들은 수년간 연중행사로 등산했다. 일제시대 제주농고 학생들의 한라산 등산은 다소 군사훈련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35 ~36년 적설기 한라산 첫 등반


한라산 산악사의 시작은 조난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시작의 단초는 1936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산악부 등반대의 조난사고다. 이 등반대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한라산 적설기 등반대로는 처음이었고 초등했다는 것과, 둘째는 한라산 등반기록상 첫 조난사고이고, 셋째는 이 조난사고로 인해 등반대장이었던 이즈미 세이치(泉靖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나, 1936년 21세 때 한라산을 등반한 후 전공을 바꾸는 즉, 제주도가 한 학자의 학문적 회심(回心)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이즈미 세이치가 작성한 한라산 동계 초등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나 내용이 잘못 전해지고 있어서, 다시 해석하고 관련문헌들을 참고해 요약하고자 한다. 원본은 김승택씨가 일본에서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고, 국내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즈미 세이치가 등반하게 된 동기는 1935년 여름 조선 철도국 방침으로 남한의 산지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철도국에 근무하는 아마이야마(飯山達雄)의 동행자로 스카웃되어 지리산을 거쳐 제주에 오면서부터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지만 등산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제주에 온 다음날 자동차로 관음사까지 가서 개미등을 거쳐 정상을 오르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표고밭에서 1박하고 서귀포로 하산했다.


서귀포에 도착해서는 차량으로 섬을 일주하면서 주민들의 생활이나 오래된 마을과 읍을 돌아다녔는데, 그 때 이즈미씨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것이 겨울철 한라산에 대한 이야기였다. 북측 개미목에서부터 위로는 눈이 깊게 쌓여 12월 중순부터 다음해 4월 말까지는 정상에 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즈미씨는 식물 상태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고, 높은 곳에 살고 있는 산촌 사람들은 설피와 털가죽으로 만든 옷을 갖고 있어, 겨울철에도 쌓인 눈을 이용하여 노루나 토끼 몰이사냥을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토끼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음).


전혀 미지의 세계인 겨울 한라산을 어떻게든 올라가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으므로, 기상 외에 여러 자료들을 챙기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 시기 경성제대 산악부는 백두산, 관모봉, 차일봉, 금강산 등 유명 산들의 동계 등반을 이미 끝내놓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안개 속 한라산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부원들은 대찬성이었다. 당시 한국 산악인들과 경쟁하다시피 국내 산을 등반하던 산악부원들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혹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한라산 등반대는 희망자가 너무 많아 대원들을 심사해 선발해야만 했다. 등반대는 이즈미 대장을 포함하여 9명으로 구성한 다음, 조선철도국의 아마이야마에게 지도원으로 참가해주도록 요청하고, 다른 기관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제주 영림서는 개미목에 산장을 지어주고 개미목산장(蟻頂小屋)이라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이 산장은 1935년 11월 말에 완성됐다.


이 산장은 이즈미씨의 다른 저서 ‘제주도의 종교’편에 등반대 조난과 관련해서 다시 거론된다. 내용은 ‘제주인들은 한라산에 움집이니 캠프니 하는 것을 세우는 것이 산신령의 노여움을 샀다고 해석했다. 한라산은 제주도에서 성소 중의 성소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곳에 인공 구조물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목한 소나 말을 찾기 위해서, 또는 식물을 채취하기 위해서, 한라산에서 밤을 밝히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높은 지대에서는 1935년에 이르기까지 건축물이나 기타 인공적인 구조물을 일체 보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즈미씨가 샤머니즘을 접하고 나서는 한라산 인공구조물 제1호 산장인 개미목산장과 등반대 조난사고를 연계시켜 말하고 있다.


경성제대 산악부가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웠을 때쯤 나니와(浪速)고등학교 산악부에서 이마니시(今西壽雄) 외 2명이 한라산에 같이 오르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 흔쾌히 받아들이고,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는 나니와고등학교는 남쪽 서귀포에서 출발해 초기 밭을 거쳐 정상으로 가는 루트로 등반하고, 경성제대 산악부는 북측 관음사를 출발해서 개미등, 왕관릉을 거쳐 정상을 오른다. 둘째는 어느 팀이건 1936년 1월1일까지는 한라산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 두 팀 모두 한라산 동계 초등이란 새 역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을 등정하고 하산 도중 마에가와 도시하루(前川智春)라는 한 청년을 잃고마는 영광과 좌절을 함께 맛봐야만 했다.<계속>



◈필자(구술) 안흥찬(安興燦·72)씨는 1961년 5월 창립된 제주도적십자산악안전대의 창립대원이자 1964년 7월 창립된 제주산악회 창립회원으로, 적십자구조대 대장과 제주산악회 회장을 수 차례 역임한 바 있고, 제주도산악연맹과 고상돈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여러 차례 회장직을 맡은 바 있는 원로 산악인이다. 설악산악상(1975년), 팔공산악상(1986년), 한라산악대상(1987년), 금정산악상(1988년) 등 수상경력이 있고, 현재는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에 주력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의 고문을 맡고 있다. 집필자 진창기(秦昌璣·46)씨는 제주대학 직장산악회와 제주산악회 회장을 맡은 바 있고, 제주산악연맹 편집이사, 전무이사, 기획이사를 두루 거친 산악인이다. 현재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으로 한라산 보호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출처:월간산 

'한 라 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3]  (0) 2008.02.02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2]  (0) 2008.02.02
성판악 코스~  (0) 2008.02.02
등산 허용시간  (0) 2008.02.02
한라산 지도와 등산로~  (0) 2008.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