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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 산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2]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2]
 
한라산 동계 초등과 첫 조난 1936년 경성제대 산악부 동계초등과 1948년 한국산악회 조난

▲ 1935~1936년 이즈미 세이찌씨의 한라산 등반 보고서에 실린 사진.(1971,新潮社版, 71쪽, 김승택씨 소장)

 

한한라산 동계 초등은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산악부가 이룩했다. 그러나 동계 첫 조난대라는 비운의 등반대이기도 하다. 용진각이라는 지명은 50년대 후반에 생긴 것이고, 경성제대 보고서에는 ‘큰바위골’이라 표현하고 있다.


1935년 12월 말 경성제대 산악부는 제주도에 도착해 우선 관음사까지 짐을 올렸다. 그리고는 관음사에서 용진각까지 정찰해 보니, 스키는 물론 설피로도 통과할 수 있음을 알고 수소문하여 포터(산촌인) 3명을 구했다.


12월30일 무거운 짐을 지고 3명의 인부와 대원들은 새벽에 관음사를 출발해 해가 높은 때 개미목산장(蟻頂小屋)에 도착, 인부들을 내려보냈다. 산장은 크지 않으나 사면에 잘 지어져 있었고, 아늑하고 새 산장이라 나무냄새가 향기로웠다. 등반대는 이 산장을 지어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에 텐트를 치고 백록담 부근에 전진캠프를 칠 예정으로 준비하고 왔었다.


다음날 아침은 거짓말같이 맑았다. 일행 전원은 백록담에서 사용할 캠프의 짐들을 짊어지고 스키를 신고 출발, 왕관릉을 거쳐 화구벽에 닿았다. 서쪽으로 돌면 한라산 정상인데 나니와 고등학교 산악부와의 약속 때문에 정상으로 가지 않고 곧 바로 백록담으로 내려갔다. 텐트는 다음날 치기로 하고 짐을 내려놓고는 전원 개미목산장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은 즐거운 송년의 밤이었다.



하산 도중 마에가와 대원 사라져


1936년 1월1일 잔뜩 흐린 채 날이 밝았다. 동이 뜨기 전에 산장을 출발해 왕관릉을 거쳐 화구능선에 도착하고는 스키를 벗어 아이젠으로 갈아 신고 안자일렌해서 정상을 향했다. 남쪽에서 나니와 고교팀이 올라오나 유심히 살피면서 정상으로 다가갔지만, 결국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정상을 밟아야 했다. 정상의 하늘은 밝은 느낌인데 그것도 잠시, 밑에서 올라온 설운에 휩싸이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백록담으로 내려가 텐트를 쳤다. 그 날 밤은 3명만 막영하기로 하고, 나머지 6명은 다시 한 번 식량을 올리기 위해 산장으로 돌아갔다. 막영조 3명은 왕관릉까지 이들을 전송했다. 정상에는 눈보라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골짜기는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산장에 도착하여 불을 피우기 전에 3명은 짐을 갖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갔다. 식량을 조달하고 빨리 내려올 생각으로. 그러나 그들은 저녁 8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든 이즈미 대장은 이도 대원과 함께 안개 속의 왕관릉을 거쳐 정상으로 갔다. 정상 날씨는 여전했다. 화구에 내려가서 겨우 텐트를 찾아 밖에서 입구를 여는 순간 놀란 여섯 얼굴이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식량지원 나온 3명은 화구벽 정상까지 갔으나 산장으로 가는 길 입구를 찾지 못해 백록담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서 화구호 속의 바람은 점점 더 세어져, 텐트 지주는 꺾이고 천막 이음새는 여기저기 찢겨져 갔다. 순간풍속이 적어도 초속 40m를 넘는 바람이 짧은 간격으로 몰아치고 있었던 것 같다. 6명은 손으로 텐트를 붙잡고 지탱하는 참으로 참담한 상태였다.


이즈미 대장과 이도 대원은 텐트가 작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내일 아침 밝는 대로 마중나올테니, 일단 내일은 개미목산장으로 전원 퇴각하도록 지시하고 어둠 속에서 돌아섰다. 화구벽은 완전히 크러스트되어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면서 산장에 도착한 시간은 12시를 약간 넘어서였다.


1월2일.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어젯밤 같지는 않다. 정상에 가보니 텐트에는 6명이 짐들을 꾸려놓고 있었다. 약간의 짐과 식량을 남겨놓고, 아침에 올라간 3명은 짐을 높다랗게 짊어지고 밤을 새운 6명은 빈 몸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이즈미 대장이 앞에 서고 사도 대원이 후미에 서서 산장으로 내려오는데, 바람은 간밤에 비하면 없는 거나 진배없었다.


왕관릉으로 내려오는 길은 각자 스키를 즐기며 내려갔다. 이즈미 대장은 먼저 내려오면서 산장으로 가는 길이 꺾이는 곳을 표시하기 위해 자작나무에 삼각깃발을 메어놓았다. 이즈미 대장은 깃발 아래서 모두가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고, 피로한 대원은 없는 것 같았다. 자작나무에서 산장까지는 약 150m의 완만한 사면이다. 이즈미 대장이 산장에 먼저 도착해 불을 피웠다. 대원들은 연이어 돌아와 스키를 밖에 세우고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대원들을 확인해보니 마에가와 도시하루 대원만 없었다. 마에가와 대원은 삼각깃발 있는 곳까지는 활기차게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한 대원이 분명히 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즈미 대장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대원을 두 팀으로 나누고 한 팀은 깃발 위를, 한 팀은 깃발 아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200여m 구간을 집중적으로 수색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없고 눈은 거의 내리지 않아 시계는 좋은 편이었다.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지자 이즈미 대장은 대원 2명을 제주로 보내 마에가와 대원의 조난소식을 알리고, 수색 협조를 부탁했다.


다음 날은 등반대가 제주에 온 후 가장 맑은 날씨로 눈 덮인 산들은 청정 그 자체였다. 나니와 고교팀은 이 날 등정하고 용진각으로 하산해 수색을 도왔다. 제주에서는 소방서, 경찰서, 영림서의 사람들로 구성된 수색대가 파견됐다. 이 날 문제의 200m를 중점적으로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고, 다음 날부터는 수색 범위를 넓혀 나갔지만 허사였다. 7일간 계속된 수색에도 아무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가족들이 권하기도 하여 등반대는 1차 수색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5월 초순 사체 발견, 원인 여전히 오리무중


제주 사람들은 몰래 무녀에게 물어보았다. 섬에는 신방이라고 불리는 무속인이 많아서 신내림한 무녀가 신탁을 전하곤 했다. 신방들은 아무도 마에가와 대원이 죽지 않았다 하고 귀신들이 그를 숨기고 있다는 계시를 전했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즈미 대장이 무속을 안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서울에 돌아가자 바로 조난경위를 산악부장인 아베 선생과 스키산악회 회장 다케나카 선생을 비롯하여 부원들에게 보고했다. 보고서를 본 아베 선생은 “해군항공대에서는 조난당한 비행기 날개의 작은 파편만 찾아도 조난원인을 알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이같이 동화 같은 보고밖에 할 수 없느냐?”고 질책했다.


이즈미 대장은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만 마에가와 대원을 찾지는 못한다할지라도 다시 한 번 현장에 가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1월이 끝나갈 무렵 친구 이도와 한라산을 다시 찾았다. 용진각에 도착해 보니 엄청나게 눈이 쌓여 있었다. 마에가와 대원이 혹시 산장 입구를 지나쳐 동탐라계곡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음날 동탐라계곡으로 갔다가 몇 번의 크고 작은 눈사태를 만나며 겨우 탈출해 다음날 관음사에 도착했다.


이즈미 대장은 이번 산행으로 결론짓기를 “마에가와 대원은 동탐라계곡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삼각표지기의 조금 위부터 산장 사이에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살아 있지 않다”였다.


5월 초순 월요일 아침 마에가와 대원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전보를 서울에서 받았다. 일요일에 제주도 수색대원들이 개미목산장 부근을 수색하던 중 잔설 속에서 마에가와 대원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유족들과 이즈미 대장은 급히 현장으로 갔다. 마에가와 대원은 깃발 바로 아래쪽에 엎드려 잠자듯 죽어 있었다. 몇 번이나 수색했던 눈 속에서, 그것도 산장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곳이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이즈미 대장에게는 신방이라는 무녀와 우연히 만난 것이 전공을 바꾸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막연한 그 무엇에 대한 해답을 무녀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제주도 첫 인상은 강렬하고 이질적인 세계였다”는 이즈미 세이치는 후일 “제주에서의 조난은 나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쓰고 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공을 문화인류학으로 바꾸었다는 그는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70년 55세로 별세할 때까지 일본의 문화인류학 연구 수준을 크게 높인 사람이다.


이즈미의 학문은 제주도가 고향이요, 그의 학문 밑바탕에는 제주도의 풍토가 깊고 두텁게 가로놓여 있었다. 1938년 ‘제주-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란 제목의 졸업논문을 썼고, 1966년에는 ‘제주도’란 제목을 달아 ‘동경대학 동양문화 연구보고’로 간행하기도 했다.


▲ 마에가와 도시하루 추모비 앞에서. 오른쪽에서부터 안흥찬(필자), 김형희, 왼쪽에서 세번재가 김현우씨.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러나 사실인 이 조난사고는 아직까지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추측만 할 뿐. 영원히 한라의 품속에 안긴 고 마에가와 도시하루(前川智春)씨 묘비는 용진각 남동쪽 50m 지점에 세워져 있으며, 2002년 여름 확인 결과 묘비 주변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제주영림서에서 이 등반대를 위해 개미목에 산장을 지어주고 왜 의정소옥(蟻頂小屋)이라 이름을 붙였을까? 의경(蟻頸)소옥이 맞을텐데. 필자가 궁금하여 기어다니는 개미를 관찰해본 결과 개미는 등을 지나 목으로 내려가는 경계 부분이 제일 높았다. 그래서 꼭대기를 나타내는 뜻에서 의정(蟻頂)소옥이라 명명하지 않았나 싶다. 시중에 의항(蟻項)소옥이라 소개된 책자가 있으나 맞지 않은 것이다.



 

 

 

 

 

해방 후 단체로는 한국산악회가 처음


1940년대 초반에는 제주농고 학생들이 한라산을 올랐다는 기록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제주농고의 한라산 등산은 1946년부터 제주도 일주로 대신하고, 1948년에는 4·3사건으로 중단됐다.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져 국토가 분단되고 나서는 백두산, 금강산 등 북한에 있는 산들을 오르지 못함에 따라 산악인들은 자연스럽게 한라산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라산은 경성제대 산악부의 조난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일본군의 입산금지 조치로 오르지 못했었기 때문에 제주도민은 물론 국내 산악인들에게 한라산 등반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현재 제주산악회 명예회원인 이기형씨가 친구 몇 명과 한라산을 올랐고, 제주도민 일부가 한라산에 올랐지만, 산악단체 등의 공식적인 산악활동이 아니어서 보고서가 없고, 카메라가 귀한 시대여서 등반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해방 후 산악단체 첫 공식 등반은 1946년 2월26일부터 3월18일까지 한국산악회가 국토구명사업으로 실시한 제1회 한라산 학술등산대였다. 계절적으로는 봄이지만 눈은 쌓여있는 상태였다. 등반대 규모는 단장에 송석하 회장, 등반대원 9명(리더 김정태), 학술대원 9명 등 총 1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학술대에는 미국인 3명도 참가했다.


등반대는 2월26일 서울을 출발, 3월1일 아침 목포에서 미군 특별 수송함 LST를 타고 출항하여 제주에 도착했다. 3일에는 제주에서 강연과 영화회를 개최했다. 등반대는 관음사 코스로 등반하기 위해 3월4일 개미등까지 정찰등반을 한 다음 3월6일 관음사를 출발해 한라산 등반을 성공리에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다.


한라산 학술등산대는 21일 여정의 학술조사와 등반을 마치고 귀경하여 귀환보고 강연회를 열었고, 이때 촬영한 기록영화 ‘제주풍토기’를 한국산악회 주최로 자유신문사와 공동기획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1948년 한국산악회 조난사고


한국산악회는 제1회 한라산 학술등산대 등반에 이어 1948년 적설기 한라산 등반을 위해 1월9일 저녁 제주 산지항에 도착했다. 그 배에는 서북청년단원들이 많이 타고 있었고 상륙하는 데 검문검색이 까다로웠다.


2년 전에는 너무 늦은 시기여서 눈이 적은 때 등산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본격적인 엄동 적설기에 한라산을 등반하고자 우여곡절 끝에 전탁 대장과 현기창, 박종대, 남행수, 신방현 대원 등 5명으로 등반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12일. 때마침 많은 눈이 내려 있었다. 등반대는 관음사를 출발해 오후 3시 제주영림서가 경성제대 산악부를 위해 지어주었던 개미목산막터에 도착해 인부들을 하산시키고 대원들은 깊은 눈 위에 막영했다. 다음날은 정상에 오른 다음 백록담 분화구로 내려가 막영했다. 그러나 기상은 악화되어만 가고 더 이상의 운행은 불가능하게 됐다.


14일. 천막 안에 대원 5명이 둥글게 앉았다. 외부에서 압축해 오는 눈의 압력을 밀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넓었던 천막 안은 이마가 맞닿을 지경으로 협소해지기 시작해 행동의 제약을 받는 한편 더 이상의 인내는 질식사를 초래할 것만 같았다. 나이프로 천막을 열십자로 찢고 빈 통조림통을 빠지지 않게 끼웠다. 그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는 생기를 주었고 그 맛이란 참으로 달고 싱그러웠다.


그러나 눈의 압력을 더 지탱할 수 없어 천막에서 나와 돌아가면서 밖에서는 스키로 천막 주위의 눈을 쳐내고 안에서는 천막을 물러내는 작업을 두 차례 거듭했다. 눈의 압력과 싸우느라 잠과 피로를 잊은 하루였다.


15일. 악천후 속에서 한라산을 벗어나기 위해 바람을 등지고 남쪽 서귀포로 내려가려 했으나 탈출로를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북쪽 제주시로 하산하기 위해 내려오다 날이 어두워서 비박을 해야만 했다. 날이 밝자 용진각에 내려와 개미등으로 나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불가능했다. 가능한 길은 탐라계곡뿐이라고 판단하여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밤 9시경 전탁 대장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국내 산악인으로는 첫 조난사고다. 나머지 대원들은 다음날 밤 9시에 구사일생으로 관음사에 도착했다. 불을 피워 구두끈을 녹인 다음 신발을 벗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산악회는 구조대를 파견하여 1월20일부터 12일간 유체 수색등산을 하였으나 신설로 인해 수색을 중단하고 하산해야만 했다. 3월9일 제2차 조난수색대를 파견해 15일 탐라계곡에서 전탁 대장의 유체를 발견하여 안치하고, 다음날 백록담과 왕관릉에서 등반대 유실장비를 회수했다.


20일 홍종인 부회장과 유족대표들이 참가하여 탐라계곡 현장에서 다비식을 거행했다. 이 현지 장례는 전탁 대장의 조카 전담씨가 다비식의 불을 붙였다. 23일에는 제주불교 포교소(관음사)에서 합장영결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관음사는 4·3사건으로 유해와 함께 소실돼 버렸다.



▲ 1940년 제주농고의 한라산 등산. <제농80년사 I>(1990)에 게재. 제주농고의 한라산 등산은 1946~1974년은 제주도 일주로 대신하고, 1948년에는 4·3사건으로 중단된다.
4.3사건 이후 7년간 산악사 단절 시기


그로부터 열흘 후인 1948년 4월3일.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않은 역사적인 4·3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자 진압을 위해 10월17일 제주도 경비사령관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령을 발동함으로써 당연히 한라산은 입산할 수 없게 되었다. 한라산 산악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겨우 싹이 꿈틀거릴 때쯤 된서리를 맞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4·3사건은 서적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로 많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는 게재할 내용이 아니지만 산악운동과 연관되는 부분과 4·3사건을 당시의 표현으로 일부를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진압을 위한 지휘계통에 있었던 사람들의 명령했던 내용을 보면, “제주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대통령),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라”(경무국장), “제주도의 4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국방장관) 등이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는 명령이다. 섬뜩하다 못해 광란에 가깝다.


거기다 서북청년단원들이 경찰보조 기능을 부여받아 진압에 가세했다. 진압작전은 강력한 토끼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三盡)’이라는 전율할 작전이었다.


1952년 가을 들어 경찰은 6개 대대를 한라산에 투입, 대대적인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경찰은 이 소탕작전에서 재산(在山) 공비두목 등 8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과 내부 암투 등으로 공비의 수는 20여 명으로 줄어들게 됐다.


이 때부터 식물학자 부종휴씨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무장경관을 대동하고 한라산에 식물을 채집하러 다녔다. 가끔 고영일씨와 현임종씨 등 몇 명은 등산을 목적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현임종씨는 공비가 있는 1953년 8월부터 1954년 9월 한라산이 개방되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한라산에 올랐다. 이들 세 명은 후일 산악안전대와 제주산악회 창립회원이 된다.


잔비소탕작전을 더욱 강화한 경찰은 1953년 11월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한 데 이어 1954년 3월에는 지휘자급이던 이모씨를 체포했다. 공비 수가 10여 명으로 줄어들어 저항능력을 완전히 상실됐다고 판단한 제주도 경찰국장은 1954년 9월21일 한라산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사실상 도 전역을 평시체제로 환원시켰다. 한라산 등반시대의 서막이기도 했다.


▲ 1954년 10월 5일 한라산 정상 개방기념으로 제주대 학생들이 한라산을 올랐다(개미등). <그때 그 사건 제주 반세기>(진성범.1997.제민일보사)에 게재.
한라산 개방 후 1955년 봄까지 전국 15개 산악회가 한라산을 등반한 것으로 나타났고, 또 많은 학술연구팀들이 암흑에 가려졌던 한라산의 각종 초목들을 채취하기도 했다.


경찰은 1955년 가을 현재 한라산에 남은 공비는 여자 1명을 포함, 5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나머지를 소탕하기 위해 한라산 개방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소탕작전을 펼쳤다. 특히 경찰은 관음사 옛터에 신선대 본부를 두고 계속 작전을 펴나갔다. 우연하게도 필자가 2002년 11월30일 제주 서부에 있는 대병악이라는 오름에서 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발 포탄을 발견하여 신고하기도 했다.



 

 

 

 

 

1955년 한라산 개방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해제되고 1년 뒤인 1955년 9월21일에는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가 건립됐고, 그 비는 아직도 한라산 정상에 서있다. 출입이 통제된 지역에 세워져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漢拏山開放平和紀念碑 檄文 永遠히 빛나리라 濟州道警察局長 辛相·氏는 四·三事件으로 八年間 封鎖되였든 漢拏寶庫를 甲午年 九月 二一日 開放하였으니 오즉 英雄的 處事가 않이리오 다만 全道는 寄與된 自由와 福音에 感訓할 것이다. 檀紀 四二八八年 九月 二一日 神選部隊長 許昌洵 記 東和林業社長 李光哲 建立’


결국 경찰토벌대는 1956년 4월 공비 교육책을 사살하고 1957년 4월에 최후의 공비로 알려진 오모씨를 송당리에서 생포했다. 이로써 장장 10년 가까이 도 전역을 공포와 살상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피비린내 나게 했던 4·3사건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잠복해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로 인해 부모형제와 일가친척들은 공무원 시험을 비롯하여 취직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신원조회 결과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는 등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대량학살의 회오리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깊은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지나온 순간들에 관해 말문을 열었다가는 자칫하면 불순분자로 오인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1974년 제주산악회 대만 옥산 해외등반에서도 연좌제로 인해 여권발급이 어려운 회원들은 아예 참가하지 않았거나 발급받는 데 5개월이나 걸린 회원도 있었다.


4·3은 자료에 의하면 무장전위대 500여 명과 그 동조자가 1,000여 명인데 반해, 요즘 제주 4·3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조사대상은 14,000여 명이고, 없어진 마을은 77개 마을이다. 하지만 관련단체에서는 조사(피해)대상자 수를 3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가족이 몰살돼 신고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4·3을 소개한 이유는 4·3은 제주도민의 아픔이요, 우리 나라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피해자 중 일부이긴 하지만 명예가 회복되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이즈미 세이찌씨가 작성한 등반보고서를 해석해 주신 이창식님과 김희정님께 고마운 말씀을 전한다.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출처: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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