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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4]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4]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와 제주산악회의 활동

196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라산에서 많은 인명사고가 일어나 1961년 5월14일 제주도에는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라는 산악안전과 구조 등 봉사를 위한 산악단체가 탄생했다.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단위지역으로 볼 때 등반을 목적으로 하는 산악단체보다 산악조난 예방과 인명구조를 목적으로 하는 산악단체가 먼저 만들어진 사례는 세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산악안전대는 김종철, 고영일, 안흥찬, 부종휴, 현임종, 김형희, 김규영, 강태석, 김현우 등이 제주도적십자사에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초대 대장에 김종철을 선출했다. 9명으로 시작했지만 뜻있는 젊은 산악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두 달여만인 8월1일에는 27명으로 불어났다. 창립대원들은 대부분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담고 있었다.


산악안전대 역대 대장은 1961년 김종철이 초대부터 4대까지 역임했고, 1969년 제5대 대장에 안흥찬이 취임했다. 이후 김승택, 김태열, 양하선, 고길홍, 박훈규, 장덕상 등이 역임했고, 현재는 강경호가 대장을 맡고 있다.



초대 대장 김종철은 제주 산악계 정신적 지주


특히 초대부터 8년간 대장직을 수행한 김종철은 취임 당시 34세였으니까 한라산 개척에 젊음을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95년 제주도내 360여 개 오름(기생화산)들을 한 데 모은 <오름나그네>를 발간함으로써 제주인의 오름 정신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족적은 제주 산악문화의 기반을 다져놓아, 제주도 산악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가 되는 큰 인물이다. 지금은 타계하고 우리들 곁에 없지만 그의 산악이념은 제주도 산악인들 가슴속 한 구석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산악안전대 초창기 기록을 더듬어보면 김현우의 활동기록이 상당히 미미하다. 그는 당시 제주도적십자사 청소년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대원들이 한라산에 출동할 때 작성하는 ‘행동명령부’에 기재하지 않고 직원들이 쓰는 ‘근무상황부’에만 적어두었기 때문에 정확한 활동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산악안전대 행사와 훈련, 구조등반에 대부분 참석했음은 물론, 포괄적 지원으로 산악안전대가 원만히 이어져 나아갈 수 있도록 음지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모두가 김종철, 안흥찬에 버금가는 활동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 다뤄지는 산악안전대 활동내용에는 확인된 기록들만 나열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60년대 제주도 등산사는 산악안전대 역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다행히도 산악안전대 창립 40년사를 발간하기 위해 현 대장인 강경호가 묻힌 자료들을 찾아내 제공함으로써 이번 제주도 등산사편에 이용하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제주도적십자사와 산악안전대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와 개인 소장자료를 보충하고, 제주도지와 신문기사와 인터뷰 기사를 근거로 작성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완벽한 산악사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강경호 대장은 인터뷰에 늘 동행하고 있고, 당시 기록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확인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구술과 집필자의 보좌와 자문역을 맡아주고 있다.



6년동안 16회에 걸쳐 등산로 개척 활동


산악안전대는 1961년 8월1일부터 5일간 창립 후 처음으로 한라산 훈련등반과 등산로 개척등반을 실시했다. 등반대 구성은 훈련대장 고영일과 대원 18명, 대한적십자사 공보부장 김호진과 취재기자 등 총 33명을 3개조로 나누었다. 등반하면서 코스 설치와 등산로에 위험표지판과 안내판, 응급구호소를 설치했다. 이후에도 산악안전대는 한라산 등산코스가 완성되지 않아 일반인들이 등산하면서 곤란을 겪거나 인명사고에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되면 안내판과 표지기를 달아 등산객들이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갔다.


1961년 가을이 되면서 관음사 코스와 서귀포 하원 코스에 달아둔 표지기를 안내전문 상인들이 제거해버리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표지기만 따라가면 되니까 안내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산악안전대가 한라산 지킴이로서 역할을 확실히 해줌으로써 한라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인명사고가 줄어들면서 등산이 대중스포츠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962년 5월9일부터 4일동안 산악안전대의 활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강습회를 개최했다. 강사는 미국적십자 극동본부 안전사업국장 레이니와 대한적십자사 보건부장 김연주였고, 이론강의는 제주시내에서 하고 실습은 한라산에서 했다.


적설기 첫 훈련등반은 1964년 1월24일부터 2박3일간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대원 등 9명이 신입대원 훈련을 겸한 한라산 동계등반으로 치러졌다. 코스는 제주시를 도보로 출발해 관음사, 용진각, 정상을 등정하고 역순으로 하산했다.


산악안전대의 60년대 기록 중 등산로 개척활동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6년동안 관음사~탐라계곡~용진각~정상 코스, 서귀포~남성대~방아오름~정상 코스, 성판악~정상 코스, 99곡~어승생~만수동산~정상 코스, 영실~탑궤~정상 코스에 16회 51일간에 걸쳐 연인원 110명이 동원됐다. 등산로 표시를 위한 등반 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휴대했던 물건들은 안내판, 표시판, 방향표지판, 비닐표시, 못, 망치, 삽, 페인트, 휘발유, 붓 등 다양하다. 한 번 출동에 2~3명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태풍과 폭우로 인해 1963년 8월3일부터 3일간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대원이 등반자 안전교도차 등반했고, 1965년 7월17일부터 2일간 김종철 대장과 김규영 대원이 악천후의 등산객 조난방지와 지도안내차 등반했다.


1966년 8월30일부터 2일간은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강태석 대원이 태풍 베티로 인한 안전교도차 등반해 64명을 영실, 탐라계곡, 용진각 대피소로 안전하게 대피시켰고, 1967년 7월27일부터 3일간 김종철 대장이 태풍 엘렌에 따른 등반자 교도차 등반했다.


안내등반으로는 1963년 8월23일 일본 와세다대학 산악부원 6명이 한라산을 등산하는데 김종철 대장이 안내등반을 맡아 주었고, 1966년 6월3일에는 제주도에서 주최하는 한라산 등반대회 안내 및 안전등반을 위해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김규영, 강태석, 김형희, 현임종, 임석효 대원이 참석했다. 코스는 성판악을 출발해 정상을 거쳐 개미등, 관음사로 하산했다. 대회참가자는 200여 명이었다. 특히 등반대회를 전후해 등산하는 일반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3일간 안전계도등반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제주도청이나 경찰청, 학교 등 여러 기관에서 공식·비공식으로 요청하여 협조차 동행한 등반이 무수히 많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주로 구조나 안내등반, 등산로 표시 작업이었다.


이처럼 60년대 산악안전대의 활동은 한라산 코스를 다듬고 등산객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활동에 대원들의 젊음을 바친 시기라 할 수 있다. 산악안전대는 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12월26일 제주도공익상(사회봉사 부문·부상 100만원)을 수상하기도 했다.


요즘 등산로 입구 안내판 내용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1965년 산악안전대가 한라산에 세웠던 등산안내판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山은 慈愛롭고도 無慈悲합니다. / *즐겁고 安全한 登山을 위하여 / 一. 無謀한 行動은 遭難의 原因이 됩니다. / 二. 充分한 食糧과 裝備를 갖춥시다. / 三. 익숙치 않은 코스는 반드시 案內人과 同行합시다. / 四. 樹木을 함부로 다치지 맙시다. / 五. 岩石은 大的으로 굳지 않으니 注意합시다. / 六. 標識板이나 山莊施設을 損傷치 맙시다. / 七. 물은 깨끗이 씁시다. / 八. 宿營地를 떠날 때는 다음 사람을 위해 淸掃, 整理하고 火木을 마련해 둡시다. / 九. 有故時 가까운 표고밭이나 警察 또는 本 安全隊에 빨리 連絡합시다.’



네번째 조난과 적십자대피소


60년대 제주도 등산사를 읽다보면 조난사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고일지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한 내용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쓰는 것이 역사요 진실이기 때문에 연혁을 쓰듯이 나열하고자 한다. 오히려 산에서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조난사고사(死)인 경우는 당사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아 성씨만을 쓰고자 한다. 살아있는 가족들에게는 아픈 기억이기 때문이다.


1962년 7월22일 서울대 사범대 송화진군이 일행 3명과 한라산을 등정하고 하산 도중 왕관릉에서 동료들과 헤어져 헤매다가 무사히 하산한 운 좋은 예가 있었는가 하면 다음은 그렇지 못한 경우다. 1962년 태풍 로라가 상륙한다고 예보한 다음날인 8월1일 전남대 건축과 2학년 오모군(당시 23세)은 동료학우 이하규, 안공순 등 2명과 한라산을 등반하다 탁류에 휩쓸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3명은 쌀 한 말과 모포 한 장을 준비해 서귀포를 출발, 한라산 정상에 오른 것은 오후 2시. 이 때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급격한 기상변화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계획한대로 제주시쪽으로 하산하기 위해 4km 정도 내려왔을 때 태풍이 폭우까지 동반해 맹렬한 기세로 이들을 덮쳤다. 이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숲속에서 1박했다. 다음날 아침은 기상이 더 악화됐지만 하산을 강행하여 오전 11시 탐라계곡에 도착해보니 계곡에는 탁류가 흐르고 있었다. 몸집이 제일 큰 오군이 먼저 건너다가 아차하는 순간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나머지 두 명은 겨우 정신을 추스리고, 다음날 죽을 각오로 계곡을 건너 아침 9시30분 관음사 옆 영주장에 도착해 조난사실을 알렸다. 8월3일 조난자 수색을 위해 산악안전대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대원이 경찰들과 같이 출동해보니 계곡의 물은 많이 줄어 있었고, 오군의 시신은 그가 건너려던 지점에서 150m 떨어진 곳의 가로놓인 고목에 걸려 있었다.


10월4일 오군이 건너려다 목숨을 잃은 지점에 제주도적십자사는 4만9천 원을 들여 탐라계곡 적십자대피소를 신축했다. 석축콘크리트 구조 함석지붕으로 면적은 6평이었다. 이 대피소는 관음사 코스 등산객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지만 지금은 헐려 없어졌다. 협소한 대피소를 보완하기 위해 조금 밑에 새로 지은 대피소마저 ‘이 건물은 철거대상 건물입니다. 붕괴위험이 있으니 접근하지 마십시오’라는 팻말만 붙어있다.


관음사 코스에 현존하는 탐라계곡대피소와 한라산에서 가장 오래된 용진각 원형대피소는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의해 철거대상 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유는 붕괴위험과 흉물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대피소는 시내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석축건물이라는 신비로움과 한라산 중턱의 풍광과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보수하여 울타리를 친 다음 산장내력을 적은 안내판을 설치한다면 오히려 등산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로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흉물스럽지 않고, 하나의 한라산 대피소 역사현장이라 느끼기에 충분하다. 또한 용진각과 탐라계곡 사이에서 폭우를 만나거나 탈진하는 등 최악의 경우에는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부셔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무지개등반


1962년 10월6일 한라산에 무지개등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산악안전대 창립대원인 고영일은 5·16 때 부이사관 대우로 재건국민운동본부 도지부 운영부장을 맡았다. 제주도 사람으로는 제일 높은 직위였다. 간부회의 때 제주도민 단합을 위한 행사가 없겠는가 논의한 결과 고영일의 추천으로 한라산 등반이 결정되어 행사명을 무지개등반으로 하고 세부사항을 기획해서 만들어졌다.


내용은 제주시, 조천, 구좌, 표선, 남원, 서귀, 대정, 중문, 안덕, 한경, 한림, 애월(이상은 제주도의 시·읍·면) 등을 7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무지개색 재건깃발을 하나씩 들고 한라산 정상에서 만나는 등반이었다. 산악안전대에서는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김현우, 김두현 대원이 안전등반 협조차 같이 등반했다.


이 행사를 등반대라 표현하는 데는 반론이 있기는 하다. 무지개등반은 제주 산악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참가했던 산악인들마저도 잊혀진 등반이다. 그러나 목적이야 어쨌든 전도민을 대상으로 한 민관 합동등반이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록에 한라산 정상 높이를 1,952m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일제시대에 측정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등반을 마치고 제주도지에 기고했던 글을 보면 무조건 개발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서두에 보면 ‘자연미의 보고인 한라산에 관광객 유치를 위한 스키와 수렵장, 그리고 식물원, 하계캠프와 케이블카 등 제 시설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일이야말로 초미의 급무인 것이며, 또한 한라산 중턱의 끝없는 벌판을 갈아 제쳐 북구의 정말(丁抹)을 방불케 하는 낙농의 새 터전을 닦아야하는 것도 중요한 일의 하나라 하겠다. 이러한 많은 과업을 목첩(目睫·거리가 아주 가까운)에 두고 이번에 재건국민운동 도지부가 주최한 한라산 등반은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할 것이다’로 시작된다.


10월6일 아침 재건국민운동 도지부가 주최한 한라산 무지개등반을 위해 등반대 본부대원들이 도지부에 모였다. 김영길 법원장, 최찬식 검사장, 유백 부장판사, 상공회의소 이태진 상무, 제일극장 장 사장, 도립병원 내과 과장, 검찰청 임서무 과장, 안흥찬 문화원장, 적십자제주지사 김인옥, 도지부 고영일 운영부장, 도청 강상보 공보계장, 여자는 공옥자양과 4명 등 25명이다. 본부대원들은 산천단까지 트럭을 타고 가서 걷기 시작해 관음사를 거쳐 표고밭에서 숙영했다. 이튿날은 용진각에서 막영했다.


10월8일 아침 6시 기상. 아침밥을 먹고 끓은 물을 수통에 채워 이슬에 젖은 아침 등산로를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왕관릉을 거쳐 백록담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20분이었다. 백록담의 둘레를 동쪽부터 시작해서 한 바퀴 돌고, 12시10분 백록담 분지에 내려서서 행동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경 각 지구 재건청년회원들이 재건기를 앞세우고 백록담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본부대 35명(여자 5명)을 비롯해 제주시 7명, 조천·구좌 11명, 표선·남원 9명, 서귀 17명(여자 10명), 대정·중문·안덕 12명, 한경·한림·애월 3명 등이다.


오후 2시가 되어 백록담 분지에서 한라산 등정 기념식을 거행했다. 고영일 운영부장은 기념사에서 ‘등반의 길을 걸어온 신고(辛苦)의 체험을 바로 재건의 길에 옮겨 각기 이해를 초월하여 묵묵히 건설하는 일꾼이 됨으로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자’고 역설했으며, 김 법원장은 축사를 통해서 ‘백록담을 정복한 여기 모인 재건청부녀회원들이 오늘 걸어온 그 땀어린 경험과 체험을 살려 재건청부녀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개발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한라산의 자연미를 잘 보존하고 관광객을 유치하여 살기 좋은 낙원을 이룩하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찬식 검사장의 만세삼창을 끝으로 30여 분만에 식을 모두 마쳤다.


모든 대원들은 백록담 서북벽으로 하산하기 시작하여 선작지왓과 탑궤, 오백나한을 지나 영실 입승정에 도착하여 막영했다. 10월9일. 아침밥을 먹고 오전 9시 반에 입승정을 출발, 오후 1시 반 어리목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어리목을 출발한 대원들은 노루오름에 도착해 대기중인 트럭 2대에 나누어 타고 제주시를 향했다. 트럭이 제주시에 가까워지자 등반대원들은 재건의 노래 ‘…펄펄펄 휘날리는 재건의 깃발 아래서…’를 합창하면서 힘찬 기개로 제주시 관덕정 앞에 도착했다. 오후 6시40분이었다.


등산 중에 개미등에서 156명의 남녀로 구성된 등반대와 영실에서 오현고교 고봉식 교장과 김원형, 이기형 인솔자와 오현고 학생 60명을 만나기도 했다.



1964년 제주산악회 창립


1961년 만들어진 산악안전대의 활동은 등산로 개척과 정비, 인명구조 등 등산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종휴, 김종철 등이 전문산악단체를 만들자고 제의해 1964년 7월21일 제주도적십자사 사무실에 부종휴, 김종철, 안흥찬, 고영일, 김현우, 현임종, 김두현, 강태석, 고영섭, 최양명 등이 모여 제주산악회 결성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 회장에 제주농고와 오현고 교장을 역임한 홍정표를 선출하고, 부회장에 부종휴를 선출했다. 제주산악회는 제주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산악회로 그 모태가 산악안전대여서 창립 당시부터 산에 대한 기본지식은 갖춘 상태에서 출발했다.


제주산악회가 주최 또는 주관한 산악행사로는 1967년 제1회 한라산 철쭉제, 1968년 제1차년도 국토종주 삼천리, 1970년 제1회 한라산 집중등반, 1974년 제1회 한라산 만설제(현재까지 주최), 전도 산악인의 밤 등이 있다. 1970년대 이전에 시작된 산악행사는 모두 제주산악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1969년 6월에는 1개 산악단체로 제주도산악연맹을 만들어 대한산악연맹에 가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외등반으로는 외국여행이 어렵던 1974년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대만 옥산과 일본 북알프스를 등반했다. 1996년에는 6대륙 최고봉 등정계획을 세워 매킨리를 등정하고, 국난인 IMF로 잠시 중단했다가 2001년 아콩카구아, 2002년 킬리만자로를 등반했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해외고산을 등반한 회원 수는 히말라야를 비롯해 세계 각지의 산에 연인원 150여 명이 다녀왔다.


도내 산악활동으로는 1966년 월례등반 계획을 세워 만장굴 탐사를 비롯해 60년대만 31회를 등반하며 한라산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1966년 이전의 활동 기록은 정리해둔 것이 없어 아쉽기도 하다.


60년대 제주산악회가 후원하거나 안전등반요원으로 참가했던 등반은 1967년 9월24일 제주도에서 주최하는 등산대회와 11월7일 한라문화제 한라산 등산대회, 1968년 9월28일 제1회 YMCA 등반대회, 1969년 1월 제1회 전국 대학생 적설기 한라산 등반대회, 11월8일 제8회 한라문화제 한라산 등반대회 등이며, 1967년 9월29일에는 제주도지사 표창장과 부상으로 3,000원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제주산악회는 많은 지역사회 산악행사에 적극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역대 회장으로는 1964년 초대 회장에 홍정표, 1967년 7월 제3대(~6대) 회장에 안흥찬이 취임했으며, 이후 김현우, 양하선, 김용구, 이경서, 박용철, 문의승, 진창기 등이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박훈규가 회장을 맡고 있다.


제주산악회는 제주도 산악계의 맏형으로 제주 산악문화의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제주 산악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한국 산악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제주도 산악계 종가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 전국 굴지의 산악단체다.<계속>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출처:월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