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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 산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5]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5]
 
산악안전대가 앞북 치면 경찰구조대 뒷북 치고
다양한 한라산 조난사고 유형과 국토종주 삼천리 시발

한라산 찾은 사연도 다양
1963년 6월16일에 여성잡지사 김규혁(48), 이문환(32) 기자 2명이 조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두 기자는 16일 오전 7시경 서귀포를 출발해 정상에서 1박하고 17일 정오 제주시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18일까지 도착하지 않아 난리가 났던 사건이다. 다행히 출동한 산악안전대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김현우 대원에 의해 발견돼 안전하게 내려왔다.

▲ 산악안전대 한라산 동계 구조훈련(장구목). 제주적십자사 소장.

이들은 취재차 12일 제주에 도착, 마지막 코스로 한라산을 취재하고자 16일 출발해 오후 3시 반 정상에 도착했으나,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 뒤 폭우가 마구 쏟아져 어쩔 수없이 행동을 멈추고 정상에서 대피해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비닐보자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간이 텐트를 만들고 비를 가렸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18일 아침 8시경 비가 멈춘 틈을 타 하산했는데, 다시 비를 만났지만 계속 하산하다가 탐라계곡과 개미목 중간지점에서 출동한 산악안전대원들을 만나 안내를 받으며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장비는 모포 1장, 쌀 1되, 지도와 나침반이고, 입도 목적은 잡지사 사장과 함께 제2회 탐라미인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았었다. 이들은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고, 출동한 경찰은 관음사 부근에서 되돌아갔다. 산악안전대가 창설되고나서 60년대에 발생한 거의 모든 조난사고는 앞북은 산악안전대가 치고 뒷북은 경찰이 치는 것이 통례였다.
1964년 7월2일 연세대 강원필 학생이 오후 5시30분경 탐라계곡 적십자사대피소에 쓰러져 있는 한 청년을 발견하고 신고했다. 부산에서 온 대학생이라는 이 조난자는 적어도 이틀 이상 굶었고, 남은 식량은 전혀 없었다. 3일 아침 출동한 김종철 대장과 대원 2명에 의해 구조된 이 사람은 경남 김해가 본적인 김모씨로 당시 32세였다. 김씨는 4개월 전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자 옛 친구가 제주도 모 관청에 과장으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왔으나 전출간 뒤였다.
전국에서 인심이 가장 좋은 고장이라 악착같이 노력만 하면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제주에 정착할 목적으로 노점상도 해보고 쥐틀 판매도 해보았지만, 지난봄 장마로 이것마저 실패. 아무리 노력해도 호구지책을 해결할 도리가 없어 자살을 목적으로 6월29일 한라산을 기어올라갔다.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시체도 발견하지 못할 깊숙한 산속을 자살 장소로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일 비가 와서 옷이 젖으므로 대피소에 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살아 계시다면 올해로 71세가 된다.

 

폭우 속 탐라계곡 익사사고 많아
1964년 8월2일 제주도에는 폭풍우를 동반한 태풍 헬렌이 몰아쳤다. 이 태풍은 최대풍속 초속 36.4m로 한라산을 등반하는 학생 일행 5명 중 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김모(19·명지대 1년), 현모(18·수원상고 3년), 오세일(19), 김구범(동아대 1년), 이광용 등 5명은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나 한라산을 등반하기로 하고 7월30일 제주에 도착해 다음날 산행을 시작했다.
관음사 코스로 정상을 오르고 하산해 용진각대피소에서 1박했다. 이튿날 이들은 태풍 헬렌호로 불어난 대피소 앞 탐라계곡을 허리띠로 연결하며 건너다가 김군과 현군이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용진각대피소 앞 계곡은 밤새 퍼부은 폭우로 물이 넘쳐 건너기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계곡 폭이 넓지 않으므로 건널 수 있다는 생각에 서로 허리띠로 묶고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다.
계곡을 건너던 중 앞서가던 김군이 미끄러지며 쓰러지자 연달아 5명이 급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5명이 50여m 떠내려가다 오세일, 김구범, 이광용 등 3명은 간신히 바위를 붙잡고 살아났으나, 2명은 급류에 떠내려 가버렸다. 겨우 살아난 3명은 정신없이 하산해 경찰에 신고했다.
8월2일 산악안전대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대원이 출동했고, 3일 김영섭, 강태석, 김규영, 현임종 대원 등 4명과 경찰구조대가 현지에 도착해 사고지점에서 약 150m 내려간 지점에서 김모의 시체를 발견하고, 수색 이틀 후인 4일 사고지점에서 200m 떨어진 바위틈에서 현모의 시신을 발견했다.
제주도 계곡은 평소에는 건천이지만 집중호우가 내릴 때는 격류가 흐른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하루나 이틀 후면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 제주도 토양 특성상 물이 빨리 스며들기 때문에 물이 오래 흐르지 않는다. 특히 탐라계곡은 물이 모여 내려오는 길이가 짧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1965년 9월4일 군인 이모 상병이 동료들과 관음사 코스로 정상을 등정한 후 무더위 속에 하산 도중 개미등에서 물을 찾으려고 동탐라계곡을 내려보다 추락사한 어이없는 사고도 있었다.
1966년 8월30일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 베티가 제주도를 휩쓰는 동안 최모(32·경북 성주군 용암면)와 곽운호는 약초를 캐러 한라산에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최씨가 피로동사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 2명은 약초를 캐기 위해 입도, 17일 조천면 함덕리를 출발해 한라산에 올라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비바람을 만난 것은 29일 저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장비인 비닐을 강풍에 날려버려 할 수 없이 바위틈에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30일 날이 밝은 후에도 폭우와 강풍 때문에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탈출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길을 잃고 몇 시간을 헤매다녀야만 했다. 오후 2시경 눈앞에 큰 바위를 발견하고 왕관릉인 것을 안 곽운호는 조금 아래에 대피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가졌으나 최씨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지점은 용진각 위 300m 지점이었다. 곽운호는 겁이 나 용진각까지 뛰어가 대피하고 있던 등반객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등반객들과 함께 현장에 왔을 때는 이미 최씨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이 때 산악안전대는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강태석과 대원 1명이 등산객, 약초 캐는 사람, 소 찾는 사람 등 64명을 영실, 탐라계곡, 용진각대피소로 안전하게 대피시켰으나 이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10월28일 김모군(19·이리상고 3년)이 장비도 없이 당일로 등산하다가 폭우로 탐라계곡에서 피로동사한 사고가 있었다.
1967년 1월 한라산을 등반하던 학생 4명 중 1명이 피로에 지쳐 탐라계곡 부근에서 동사한 사고가 일어났다. 황윤홍(20·조선대 1년), 서석주(19·영남고 3년), 박중언(19· 대구농림고 2년), 조모(18·선린상고 2년) 등 4명은 제각기 제주에 입도해 서로 우연히 만나 같이 한라산을 등산하기로 했다. 코스는 관음사~용진각~정상 왕복이었다. 1월13일 화창한 날씨에 제주시를 출발해 탐라계곡대피소에서 1박. 다음날 역시 날씨는 맑았고, 용진각에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용진각에서 점심을 먹고 정상을 향했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상당히 힘들었다.
정상에 도착한 이들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백록담을 한 바퀴 돈 후 해질녘에 용진각에 도착했다. 이 때부터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날씨는 급속히 악화되어 갔다. 그런데 성냥이 없어 버너를 피우지 못했다. 다음날은 눈보라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흐려 있었다. 아침을 겨우 때우고 하산하기 시작했으나 북풍을 받으며 걷다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만 길을 읽고 말았다. 바람은 점점 더 심하게 불어댔고, 날은 어두워져 할 수 없이 펀초를 나무 사이에 걸치고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16일 아침. 날이 개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눈보라를 뚫으며 하산하기로 하고 행동에 옮겼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 다행히 탐라계곡 적송지대에서 눈속에 파묻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탐라계곡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다. 먹을 것은 있었으나 졸려서 먹기조차 싫었다. 비박하던 중 밤 10시10분쯤 조군이 숨을 거뒀다.
다급해진 황윤홍군은 “너희들 이 자리에서 꼼짝 말고 지키고 있어라. 내가 내려가 경찰에 신고해서 구조대를 데려 오겠다”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둠 속을 뛰어 내려갔다. 황윤홍군은 다음날 천신만고 끝에 밤 9시경에야 경찰에 신고하고 쓰러져 버렸고, 살아있는 2명도 관음사로 가서 목숨을 구했다.

억울하게 구조당한(?) 이화여대산악부
1968년 새해 벽두인 1월16일 한라산 첫 여성등반대가 조난 아닌 조난사고 발생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화여대측과 한국산악회가 공군 군용기편으로 제주에 도착해 구조작업에 나섰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등반대는 이창환 교수, 김근원 한국산악회 이사, 장경옥, 정경숙, 이양준, 진완숙 등 6명과 포터 3명이었다. 이들은 관음사 코스로 정상적인 등반을 하다 개미등에 도착해서는 심한 눈보라와 초속 30m의 강풍으로 삼각봉 트레버스에 실패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등반대는 탐라계곡대피소로 후퇴했다가 날씨가 풀리면 다시 등반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짐을 먼저 꾸린 포터들이 하산하기 시작했다. 포터들은 등반대가 뒤따라오는 줄 알았는데 시간 내에 도착하지 않자 포터 백모가 내려와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내용은 ‘이대 등반대는 식량도 겨우 건빵 몇 봉뿐이고 전원이 기진맥진해 있다’고.
이 한 마디가 지난 월드컵 때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방송들은 속보경쟁이 붙고, 거의 모든 일간지에 ‘이화여대 한라산등반대 6명 조난’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나고, 중앙지 특별취재기자단 10여 명이 제주로 내려오기까지 했다. 하물며 어떤 신문은 사망한 것을 전제로 사진, 가족사항, 주소, 등반 떠나기 전에 남긴 말들을 기사화하기도 하고, ‘눈보라 속에 강행, 추위·굶주림 지쳐 구조 절망 염려’란 제목도 달았다.
신고를 받은 산악안전대는 15일 오후 3시경 김종철 대장, 안흥찬, 김현우, 오상철 대원을 출동시켰다. 산악안전대가 탐라계곡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16일 오후. 대피소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고 두런두런 말소리와 버너 소리가 들려 이상히 여긴 구조대가 “야호!”하고 소리를 지르자 밖으로 나온 이 교수 왈 “웬일이냐?”고 반문해 구조대를 어리둥절케 했다. 맥이 풀렸다. 김현우 대원은 ‘1차 구조대가 필요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 조난현장에 도착하면 경찰구조대 등 2차 구조대가 서포트해 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죽해야 이화여대 학생들이 “우리가 제주도 산악인들을 구조해 줘야겠네요”까지 했겠는가. 그들에 비하면 산악안전대원들의 장비나 신발이 엉망이었다’고 술회한다.
구조대는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주며 하산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들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하산하느냐’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하산하기로 하고 관음사로 내려오다 박씨표고밭에서 다른 구조대들과 만나 무사히 하산했다. 나중에 등반대 리더였던 장경옥은 “조난이 아닌 대피였으나,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했고, 취재경쟁을 벌였던 K신문은 허풍선 코너에 ‘無事下山! 身數·婚事 大通하겠소이다’고 소개해 허탈(?)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와 버금가는 요란했던 등반대로는 3년 후인 1971년 서울 모대학 한라산 등반대 조난 때 청와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제주도가 들썩인 적이 있다. 대통령과 산악안전대 김승택 대장과의 전화통화다. “청와대 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구조해 주기 바라오.” 이 한 마디다. 공통점이라면 두 팀 모두 인명사고가 없었다.
당시 가이드인 손성권의 기록에 의하면 가이드(포터를 겸함) 비용이 하계는 하루 2,000~3,000원, 동계는 갑절 가까이 된다고 되어 있다.

기상급변 예상치 못해 조난당해
1968년 6월28일 전북 전주시 거주 박영달(23)은 동료 김성원(25)과 함께 성판악으로 입산해 한라산 정상 부근 토굴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는데 동료와 헤어져 왕관릉에서 동쪽으로(등산로는 서쪽) 내려갔다. 가다보니 길이 아니어서 방향을 서쪽으로 꺾어 급경사인 탐라계곡을 횡단해 개미등에 겨우 올라와서는 숲속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등산로를 따라가면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하루 종일 헤맨 것이다. 30일 새벽 6시 탐라계곡대피소에 기진맥진 도착한 것을 27일부터 등산로 표시 차 등반중인 산악안전대 김종철 대장과 안흥찬 대원에게 발견되어 구조됐다.
8월16일 오후 5시경에는 등산안내인 김모(52)가 관음사 코스로 등반하던 중 물을 찾으려고 개미등에서 동탐라계곡쪽으로 가다가 추락사한 사고가 일어났다.
9월24일에는 오전 9시30분 성균관대 지도교수 1명과 학생 17명이 당일 예정으로 성판악 코스로 입산했다. 그러나 한라산 정상 앞 500m 지점에서 집중호우와 짙은 안개를 만나면서 등산코스를 벗어나 두 팀으로 흩어져 7명은 하산하고, 11명은 길을 잃은 사고가 발생했으나, 이들은 비박 후 다음날 무사히 하산했다.
1969년 11월에는 부산시 부산진구 설모 자매(23·21)가 한라산을 등반하다가 정상에서 폭우를 만나 남성대 코스로 하산 중 언니가 동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9일 아침 이들 자매는 도시락을 싸들고 별 장비도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 날씨는 쾌청했으나 이들이 정상에 선 오후 3시경에는 날씨가 갑자기 바뀌어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이들은 서귀포쪽으로 하산을 서둘렀으나 길을 잃고 날이 어두워 비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내려가는데 언니는 체력이 완전히 소모되어 의식을 잃어갔다. 이 때가 오후 2시. 언니를 업기도 하고 걸리기도 했지만, 같이 하산하기는 불가능했다. 동생은 할 수없이 언니를 비를 피해 눕히고 자기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먼저 내려가 사람을 데려오겠으니 조금만 참으라”하고 하산을 시작, 폭우 속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남성대 부근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일을 하던 정모를 만나 구조를 요청했으나 날이 어두워 갈 수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현장에 갔으나, 언니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에 아쉬운 생을 마감한 뒤였다. “언니야. 조금만 견디지. 바보야”하는 동생의 절규마저도 집어 삼켜버리는 한라산이 매정할 뿐이었다. 언니는 한라산 조난자 중 첫 여성 희생자가 됐다.
1970년대 이후 한라산 조난사고는 겨울철보다는 여름철에 많이 일어났고, 유형 또한 다양했다. 등산로 입구 경찰초소에서 폭풍주의보로 입산을 금지시키자 샛길로 입산해 폭우 속을 등반하다가 조난당했다 구조되고 나서 ‘등반 제지 불응죄’로 입건당한 사고가 있는가 하면, 폭풍우로 인해 탈진·동사한 사고들이 많았다.
또, 백록담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고가 있었는가 하면, 허우적거리는 동료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둘 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왕관릉 부근에서 밥을 먹다가 벼락 맞아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고, 용진각대피소에서 알코올버너 조작 중 알콜통에 불이 붙어 폭발하면서 화상을 입는 어이없는 사고도 있었다. 훈련등반 중 눈사태로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국토종주 삼천리 제1주자 제주산악회
1968년 7월 대한산악연맹 주최 ‘통일에의 의지 국토종주 삼천리’ 출발을 알리는 행사가 제주도에서 있었다. 제주도 산악인들이 주관한 제1구간은 마라도에서 유달산까지로 당시 제주도산악연맹이 창립되기 전이라 제주산악회가 주관했다.
1968년 7월9일 국토종주 삼천리 행사를 위해 대한산악연맹과 제주산악회 회원, 취재기자 등은 해군 GMC로 제주시를 출발, 서귀포에 있는 서귀국민학교에 도착하여 숙영했다. 7월10일 서귀포에서 어업지도선 무궁화 17호로 마라도 근해에 도착해 동해호로 갈아타고 마라도에 상륙해 대정읍장과 마라도 이장으로부터 환영 꽃다발을 받았다.
마라도 행사는 참가 산악인 전원이 서명한 연맹기와 기념 페넌트, 행사계획서를 병 속에 넣어 마라도 등대 옆에 묻고 여기를 출발기점으로 정한 다음, 파낸 흙의 일부를 병 속에 넣고 돌아왔다. 이 흙은 향로봉까지 전달하고, 통일이 되면 백두산 흙과 합토제를 지내기로 하는 숙연한 행사였다.
행사 후 서귀국민학교에 돌아와서 출발식을 가졌다. 출발식은 남제주 군수와 서귀읍장 등 기관장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귀중학교 밴드 주악으로 성황리에 진행됐고, 최두고 대회장은 제1주자 대표인 제주산악회 안흥찬 회장에게 이효상 국회의장의 친필로 새겨진 ‘統一에의 意志 國土縱走三千里’기를 전달했다. 제주산악회 안흥찬 회장은 “마라도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국토종주 삼천리 행사가 조국이 통일 되는 날 백두영봉까지 계속될 것을 다짐하며, 산을 통해 배운 슬기와 인내심으로 계속 전진 노력하겠다”고 선서했다.
종주팀은 서귀포 하원을 경유해 큰냇또를 거쳐 영실 입승정에서 막영하고, 다음날 오백나한~탑궤~윗세오름~서북벽~정상~용진각~개미등~관음사~산천단으로 내려왔으나, 원래는 용진각에서 막영할 예정이었는데 우천 등으로 강행군해 저녁 늦게 제주시에 도착했다.
7월12일 제주산악회 안흥찬 회장과 김현우, 김승택 회원이 안성호편으로 목포에 도착해 다음날 유달산 유선각에서 전남 산악인들에게 국토종주 삼천리 기와 유리병에 담은 마라도 흙과 한라산 에델바이스(솜다리) 인계식을 마치고, 7월13일 안성호편으로 귀도했다. 솔직히 에델바이스는 준 기억이 없으나 전남연맹에서 받았다니까 준 것으로 한다.
제주도 행사 참가자는 대한산악연맹 최두고 회장과 강호기, 김초영, 신종욱, 양승혁, 이원직, 최남진, 최명길 등이고, 제주산악회는 안흥찬(대장), 김현우(등반대장), 홍정표(민속고고학 반장), 오상철(동식물 반장), 박요찬, 김용구, 김병일, 문화자, 방경옥, 이정덕, 김승택(행사 기획), 취재기자 및 참여는 양하선, 고인지, 김지훈, 한철언, 손성권, 이창흠 등이었다.
34년 후인 2002년 3월31일 오전 10시50분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에는 애국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34년 전 바로 이 지점에 유리병을 묻고, 저 북쪽 향로봉까지 걸어서 갔던 그 주역들이 ‘統一에의 意志  國土縱走三千里 始發点’이라는 조그만 돌맹이를 세우는 의식을 가졌다.
비문은 안흥찬씨가 쓰고, 제주석에 새겼다. 표지석 내용은 전면에 ‘統一에의 意志 / 國土縱走三千里 始發点’, 후면에 ‘주최 (사)대한산악연맹 / 주관 제주산악회 / 1968년 7월 10일’, 옆면에 ‘60대산회 세우다 / 2002년 3월 30일’이라 새겨져 있다.
참가자는 강호기, 곽귀훈, 곽수웅, 김기왕, 김명수, 김용구, 김재도, 김종욱, 김훈봉, 박명선, 박상열, 박재곤, 박진, 성산, 신귀현, 안흥찬, 이동주, 이창억, 임문현, 조병우, 최상복 등 60대산회 회원들과 제주도 산악인 현충남, 박훈규, 안영백, 진창기, 양봉훈, 부상혁, 고행국, 나범석, 이승학, 김근애 등 총 40명이었다. 회원들 저마다 감회에 젖어보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마라도를 떠났다.
그러나 1968년 국토종주 삼천리 출발기점으로 정하고 유리병을 묻어둔 자리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깊게 묻지 않아 등대 주변 공사로 깨졌을 수도 있고 그대로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날 참석한 산악인들 가슴속에 다시 묻고 돌아서야만 하는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혹시 산벗들이 마라도에 가게 되면 등대 옆 바닷가 봉긋한 언덕에 세운 표지석을 찾아 잠시 머리 숙이고, 조국통일과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산악인들의 안녕을 빌자. 향로봉에 묻은 유리병 속에 있는 마라도 흙을 파내어 백두산 정상에서 합토제를 지내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하자. 팔도 산악인들이 백두산에 모여 천지 물을 한 코펠 가득 담아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한라산에 도착해 백록담 물과 합수제를 지내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하자.<계속>
연락 및 제보
   032-816-8596 60대산회 총무 박진
   064-754-2263 진창기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한라산 조난사고는 이미 소개한 1936년 1월2일 일본 경성제대 마에가와 도시하루(前川智春), 1948년 1월15일 한국산악회 전탁, 1961년 1월11일 서울법대 산악부 이경재, 1962년 8월3일 전남대 건축과 2학년 학생 등이 있지만, 다음 소개할 조난사고는 주로 산악안전대가 출동했던 조난사고들이다. 물론 알려지지 않은 제주인들의 조난사고, 즉 목동들이 한라산에 방목한 소를 몰러갔다가 소는 집에 돌아오고 사람은 오지 않은 황당한 사건과 같이 한라산에서 일어난 인명사고는 많지만, 기록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출처:월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