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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 산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6]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6]
 
발전과 자연보호 사이에서 고민하는 제주도
한라산 철쭉제 개최와 60년대 초부터 대두된 케이블카 설치
전설에 의하면 한라산 철쭉꽃은 영실 오백장군의 피눈물로, 매년 5월20일을 전후해 붉은 바다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한라산 철쭉제의 시발은 장엄한 풍광과 어우러진 철쭉의 모습을 산악인들만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서 제주 산악인들이 도민들과 함께 하자는 취지로 마련하게 됐다. 안전하게 산행하면서 웅장한 한라산의 모습과 철쭉꽃을 구경할 수 있고, 정상에서는 철쭉꽃 잔치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석한 도민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이 철쭉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 인파가 많아지면서 행사규모가 커져 갔고, 관광객들도 많이 참여함으로써 관광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1967년 제1회 한라산 철쭉제 열려

▲ 1960년대 한라산 철쭉제 원경. 60대산회 김용구 회원 소장(왼쪽). 1960년대 한라산 철쭉제 원경. 필자소장(오른쪽).
제1회 한라산 철쭉제는 1967년 5월21일 제주산악회 주최로 열렸다. 일정은 제주시에서 오전 6시 버스로 출발, 성판악~사라악을 경유해 정상에 올라가서 철쭉제를 지내고 개미등~산천단으로 하산해 오후 8시 제주시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행사당일 버스로 성판악까지 갔으나 폭우로 인해 코스를 변경해 물장올~태역장올~골프장을 경유해 제주시로 하산해야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회비는 200원, 참가인원은 시민 70여 명을 비롯해 제주산악회 안흥찬, 김종철, 김현우, 김형희, 현승율, 문화자, 장영자, 오상철 회원 등이 참석했으며, 주최측은 관광버스를 제공했다.

제2회 행사는 1968년 5월26일 한라산 정상에서 열렸다. 일정은 오전 6시 제주시를 출발해 성판악 코스로 정상에 올라가서 철쭉제를 지내고, 서북벽~장구목~용진각~개미등~탐라계곡을 경유해 산천단으로 하산해 오후 8시 제주시에 도착했다. 참가자는 시민 70여 명과 서울 요산산악회장(회장 한순용), 308경보대대 장병, 관광객, 한국일보 사진기자, 제주산악회 안흥찬 회장과 회원 16명이 참석했다. 이 날 처음 선발한 철쭉여왕에는 장보순양이 뽑혔으며, 철쭉여왕은 요산산악회가 그 해 가을 강화도 마니산 추계산제에 초청하기도 했다. 참가비는 500원이었고, 주최측은 기념배지와 간식, 왕복차량을 제공했다.

한라산 정상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지내는 산신제는 1470년 음력 3월16일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낸 이후 498년만의 일이었다. 물론 기우제 등과 같은 파상적인 산신제는 있었다.

▲ 1968년 제2회 한라산 철쭉제에서 처음 선발한 제1대 철쭉여왕과 함께 찍은 정상사진. 필자소장(왼쪽). 1970년대 한라한 철쭉여왕 인터뷰 장면. 한라산 정상 철쭉꽃을 꺾어서 왕관을 만들었다. 필자소장(오른쪽).
제3회 행사는 1969년 5월18일 한라산 정상에서 열렸다. 일정은 오전 6시 제주시를 출발해 성판악 코스로 정상에 올라가서 철쭉제를 지내고, 개미등~탐라계곡~산천단으로 하산해 오후 8시 제주시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화려한 철쭉꽃은 보지 못했다. 참가자는 시민 118명을 비롯해 대한산악연맹 2명, 서울 요산산악회 7명, 동아방송 기자 1명, 제주산악회원 19명, 학생 8명 등 145명이 참석했다. 시민은 선착순 100명으로 한정해 접수받고, 회비는 500원이었으며, 주최측은 기념배지와 왕복차량을 제공했다.

이 행사는 다음해인 1970년부터 제주도산악연맹이 주최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철쭉제에 일반시민들이 점차 많이 참석하고, 철쭉여왕을 뽑는가 하면 한라산 정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등 행사가 다양해짐에 따라 라디오와 TV로 중계방송까지 하게 되자 일시에 수만 명이 한라산 백록담을 찾기에 이르렀다.

철쭉제는 일반시민들이 한라산을 안전하게 등산하면서 철쭉꽃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관광객 증가에도 한 몫을 하는 순기능이 있었지만, 분화구 훼손이라는 역기능도 있었다. 그래서 10년간 백록담 분화구에서 지낸 것을 끝으로 왕관릉이나 윗세오름대피소 주변에서 산악인들만 모여 해뜨는 시각에 맞춰 철쭉제를 지내게 됐다. 요즘에는 윗세오름대피소 앞에서 낮에 등산객들과 함께 철쭉제를 지내고 있다.

▲ 1960년대 땔감으로 지은 반합밥을 먹고 있는 사진. 제주산악회 소장(위). 영실 입승정에서 제주산악회 여자회원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문화자씨 소장(아래).
1968년 한라산 철쭉제 행사 안내문에 실렸던 한라산 철쭉꽃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라산정에 피어나는 철쭉꽃에도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오백장군의 전설은 다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마는…. 옛날 아주 장성한 아들 500명을 거느리고 살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들은 모두 씩씩하고 건강하여 모든 사람들이 오백장군이라고 부를 만큼 미더웠습니다. 또한 그 아들들은 형제간의 애정도 두터웠고 효심이 지극하여 단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의 식사를 돌보는 어머니의 노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들은 죄다 나가고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죽을 가득히 쑤고 있었는데 나막신을 신고 가마솥 가장자리를 돌며 죽을 젓다가 잘못 힘을 쓰는 바람에 죽을 쑤고 있던 가마솥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아들들이 돌아왔습니다. 먹음직한 죽은 다 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안 계셔서 한참 기다렸으나 영 어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팠던 형제들은 기다리다 못해 그 죽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마솥에 있는 죽을 다 먹고나자 나막신과 함께 나타난 이상한 동물의 뼈를 보자 금방 먹은 죽이 무슨 죽인지 모든 형제들은 깨달았습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정립해 슬퍼하다 화석이 되고 말았다는 영실의 오백장군….

그 때 뿌려진 눈물 자국마다 피어나는 것이 한라산의 철쭉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철쭉꽃이 피기 시작할 때까지는 한라산도 소복을 벗지 않고 골짜기마다 하얀 눈이 남아있는 것이라는 전설을 남기고 있습니다.’

 
 
 
 
 
 
 
 
 
성판악~정상 간 도로개설 계획 저지

한라산 개발과 자연보호가 대립의 단초가 된 것은 제주도가 성판악에서 정상까지 도로를 낸다고 발표하면서였다.

‘성판악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관광도로를 개설하고자, 1965년 7월부터 기술진이 공사 가능성 여부를 검토한 결과 적격판정이 내려져, 1965년 10월25일 농림부의 사용허가를 받았다. 길이 13km, 폭 8m의 규모로, 이 관광도로가 개설되면 관광객들에게 뙤약볕 아래 허덕이며 등산하는 노고를 덜고 차창에서 한라산 절경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1966년도부터 착수할 예정인데, 민간자본이 투입되면 유료도로가 되고, 국비가 투입되면 국도가 된다’고 발표한 때가 제1횡단도로(5·16도로) 개통시기였다.

5·16 직후 37세 해군 제복에 별 하나를 달고 취임한 도지사가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공사를 추진해 완공했다. 도로명은 제주도가 공모해 ‘5·16도로’로 정하고, 대통령 친필로 제주석에 ‘5·16道路’라 새겨 산천단에 세웠다. 도로 주변에 식수할 수종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지만, 이 도로 개통은 모든 도민들의 찬사를 받았고, 성판악에 도지사 공적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후임 지사들도 경쟁하듯 제주도 개발에 열을 올리게 됐다. 그러나 5·16도로는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조기에 완공할 수 있었지만, 성판악~정상 간 도로는 개통되지 못했다. 1967년 4월21일 문교부에서 ‘불가하다’는 통보가 있었고, 도민들이 반대해서 성사되지 않았다.

1969년 여름부터는 한라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야영으로 인한 산림훼손의 심각성이 공론화되기에 이른다. 하루 200여 명이 한라산에 올라 취사와 캠프파이어용 땔감으로 천연림을 마구 잘라버려 한라산이 몸살을 앓게 됨에 따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게 됐다. 이에 따라 인명사고와 산림보호 등을 이유로 일정한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입산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불과 4년 전 등산안내판에 ‘다음 사람을 위해 火木을 마련해 둡시다’라고 했는가 하면, 한라산 등반 안내팜플릿에 ‘구상나무는 비가 올 때도 잘 탄다’고 돼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사안은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문제로 자연보호 의식이 고취되고, 당국의 관심으로 자연 치유됐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한라산 케이블카 거론

한라산 케이블카 문제는 1960년대 초반부터 새천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는 매우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사안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도에서 이슈화되고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제주도 산악인들은 초지일관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해왔고 또한 관철시켰다. 서슬 퍼랬던 군사정권시절에도 말이다. 다른 시도에도 겪고 있는 일이라 경과보고하듯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 1999년 8월 한라산지킴이가 시행한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국토순례 서명운동의 출발점인 제주항 부두. 국토순례코스는 제주~광주~부산~대구~대전~서울~제주였다. 한라산지킴이 소장(왼쪽). 1999년 한라산케이블카반대제주도민연대가 제작한 한라산 케이블카의 부당함을 제주도민들에게 호소하는 홍보물. 한라산지킴이 소장(오른쪽).
한라산 케이블카는 1962년 제주도지에 언급된 것이 처음이다. 제주도는 1967년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를 포함해 제주도 개발을 위한 7가지 사업을 문교부에 허가 신청했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1967년 4월21일 제주도에 통보하기를 ‘⑤케이블카 : 한라산 천연보호구를 유원지화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므로 지정 구역 내에서의 케이블카 시설은 불가함’이라 통보함으로써 한라산 케이블카는 1967년에 끝을 맺는다.

그러나 1년 후인 1968년 7월18일 구자춘 제주도지사가 ‘침체현상인 관광사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일반관광을 산악관광으로 확대발전시켜야 하며, 그 전기를 마련하는 방법으로 민간자본 유치에 의한 한라산 케이블카 시설을 구상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 삼우기업에서 케이블카 인가 신청을 냈다. 설치구간은 ‘성판악-사라악-왕관릉-백록담-영실’ 구간이고, 일본의 대화삭도(大和索道)건설과 제휴해 2억여 원의 시설비를 투입한다는 것이다. 한 달 후인 8월17일 기공식을 갖고, 3선순환으로 10인승에 1분간 150m 추진력을 가진 케이블카를 설치, 하루 최대 수송인원을 5,000명으로 잡고 10여km의 전체 노선 중 5km를 명년 3월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이었다.

제주도가 한라산 케이블카 시설 구상 발표와 삼우기업이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명시한 케이블카 인가 신청이 같은 날 신문에 발표됐다. 제주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1968년 11월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포도당 공장 준공식 참석차 내도 시에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를 검토하도록 지시하여 논란이 시작됐다’는 것은 맞지도 않고,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제주도는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교통부에 허가를 요청했는데 1968년 11월27일 인가됐고, 삼우에서는 1개월가량 기술측량, 늦어도 70년 가을까지는 완공할 예정이라고 했다. 삼우관광 케이블카 면허는 1968년 11월26일 교통부로부터 받았으니 하루만에 인가된 셈이다. 요즘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 1968년 7월 18일자 제남신문 케이블카 관련 기사. 필자 신문스크랩.
교통부는 케이블카 시설허가를 요청한 삼우관광에게 ▷3개월 이내에 케이블카 설치에 필요한 건설부지 확보 ▷사업개시 승인 받을 때까지 사업 양도금지 ▷면허일로부터 4개월 이내(1969년 3월까지) 기술검토를 끝내야 하며, ▷안전 분야에서 제주 또는 서귀포 측후소와 협조하여 폭풍 및 지진 등 입지조건을 세밀히 검토하여 각 정거장 및 철탑지점을 결정하고, 기후조건에 가장 적합하고 안전한 선로가 선택되도록 하며, 결정된 지점이 가장 안전한 지점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중앙관상대장의 의견서 제출 ▷전원을 한전배전에 의존할 것인가, 자가발전에 의존할 것인가 ▷운전구간의 유선통신 방법 이외에 반기 내에서 정류장 또는 운전실과의 무선통신을 갖출 것 ▷철탑에는 피뢰침, 운전실에는 풍속계, 각 반기에는 급유기와 대피구조시설, 가급적 고도는 낮게 경사는 적게 하도록 등의 조건을 달아 인가했던 것이다.

한편, 삼우관광은 성판악에 500평의 부대건물과 60평의 유기장, 사라악에 200평의 부대건물과 휴게소, 왕관릉에 150평의 휴게소, 백록담에 1,000평의 호텔, 오백나한에 300평의 유기장을 만들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한라산만은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걱정스런 반응이었다. 산악인들은 한라산 풍치림이 완전히 망가진다는 점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고, 관광인들은 관광 제주 개발을 위한 획기적인 거사로 당연히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내 학계 인사들은 어떠한 목적도 한라산 자연풍치 보존을 위배할 수 없으며, 제주도민이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은 한라산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들은 모든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한라산의 자연풍치림 보존은 도민의 의무이며, 자연풍치림이 망가진 후에는 관광제주에 기대를 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68년 12월3일 제주신문 기사를 보면, 제주대학 김두희 교수(후일 제주대학 총장)는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안 되는 것에 관계없이 한라산 자연풍치만은 보존돼야 한다. 관광개발에 케이블카 설치가 좋다고 하나 한라산이 없는 관광제주를 생각할 수 있을까. 제주도민이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은 한라산뿐이다’고 했고, 산악인 김종철씨는 ‘절대 반대한다. 한라산이 완전히 망가짐을 뜻하는 것이다. 한라산이 망가지고 난 후 제주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일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도관광협회 유하영 사무국장은 ‘찬성한다. 한라산에 케이블카가 설치되면 본도의 관광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관광객 유치에 힘쓸 필요조차 없어지며,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도민소득도 크게 향상될 것이다. 한라산 케이블카야말로 본도 최대의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라고 인터뷰했다.

백록담에 호텔, 유흥장, 산장 등을 시설하는 것으로 된 사업계획서를 본 문화재위원회는 ‘국제공원 후보로 꼽히는 한라산의 보호를 위해 케이블카 시설은 안 될 말이다’며, 한 문화재위원은 ‘교통부가 관계법규와 한라산의 세계적 가치를 짓밟고 시설을 허가한다면 국제공원연맹에 대해 창피한 일이다’고 야유하자, 교통부의 한 과장은 ‘문공부(문화재위원회)의 합의를 거치도록 조건부 허가한 것이니 허가해주지 않으면 되는 문제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산악인 김승택씨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만 매국노가 아니고, 한라산에 케이블카를 허가한 자 또한 매국노다’고 한 토론회에서 역설했다가 개인적 연분이 있는 관련자와 죽을 때까지 말도 안 했다고 한다.

1971년 제주산악회 방경옥씨에 의하면, 케이블카를 설치하려고 답사차 왔던 일행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바위를 많이 깎아내야겠다”, 출발점에 “유흥업소를 설치하겠다”, 심지어 “술집까지 두겠다”는 말을 듣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문명에서 도망쳐 나와 대자연에 안기려고 산을 찾는데, 산을 망치려드는 그 생각에는 분노를 금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계획이 흐지부지되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고 적고 있다.

결국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는 교통부의 까다로운 조건과 문화재위원들의 반대, 제주도 산악인들과 관련 학계와 많은 도민들의 반대로 물거품이 된 것으로, 완전히 진화된 것으로 착각했던 케이블카 불씨는 후일 다시 살아나 산악인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그 불씨가 70년대 후반에 다시 살아나 한 번 더 태우더니 잠잠해졌다.

1990년대 한라산 케이블카 재론

그러다 1990년대 후반에 와서 다시 한 번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불씨가 살아나 전도를 들끓게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명분은 등산객이 많아짐에 따라 답압에 의해 한라산이 훼손됐으므로 보호를 위해서 케이블카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 또한 ‘자연친화적인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라고 그럴듯하게 지었다. 초기에는 제주도 환경정책과 소관으로 제주도청 홈페이지에 케이블카 설치의 당위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제는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홈페이지에 연결된 것을 보면 한라산 국립공원이 주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제주도가 주장하는 한라산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등산객을 꼽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도청 홈페이지 ‘한라산 어제와 오늘’이란 코너에 제목이 ‘백록담에 운집한 등산객’ 사진 출처는 불분명하다.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에 등산객이 많았던 기록은 1975년과 1976년 철쭉제 때다. 1975년 5월 한라산 철쭉제에는 7,000여 명이 참석했다. 당시 홍병철 의원 등 국회의원 9명이 철쭉제에 참가했고, 산상결혼식과 철쭉여왕을 뽑는 등 행사가 다양했다. 남양문화방송은 철쭉제에 참석하지 못한 도민들을 위해 산상중계까지 했다.

1976년은 참가자가 제일 많은 해로, 도민과 관광객 5,000여 명과 제주도와 시군에서 1일 여비를 주면서 참가시킨 15,000여 명을 포함하여 총 20,000여 명이 참가했다. 제주도 행사이므로 도청 공보관실은 당연히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다. 그 때 찍은 사진이 한라산을 파괴한 현장사진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때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를 주도했던 산악인들이 환갑을 넘기고 뒤안길로 접어든 시점이라 소신 있는 젊은 산악인들이 1999년 4월 한라산지킴이(초대 회장 고성홍)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조직은 사무국, 정책실, 홍보실을 비롯해 산악, 동굴, 지질, 수질, 동물, 식물, 해양, 청소년, 문화예술, 언론분과를 두어 세계적 자연보호단체인 미국 시에라클럽과 유사한 형태의 한라산 보호단체를 결성했다. 인적 구성은 각 분과별로 전문가들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회원들을 위원으로 위촉했으며, 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대부분이 고문으로 추대되고, 많은 현직 산악회장들이 참가했다. 전체 회원은 300여 명으로 산악인과 학계가 절반의 비율로 구성됐다.

그 해 여름 한라산지킴이는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를 위한 전국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참가자는 고성홍 회장과 안흥찬 고문을 비롯해 신상범, 진창기, 이선덕, 부상혁, 부권일, 김경옥, 조옥희, 정진우 등이었다. 전국 순회 중 특히 대구산악연맹은 임문현 회장을 비롯해 가맹단체 회장과 차재우, 여환승 등 50여 회원들의 크나큰 환대는 정말 잊을 수 없으며, 다시 한번 고마운 말씀을 전하고 싶다.

진창기는 토론회에 참가해 ‘자연친화적인 한라산 케이블카’를 ‘천사표 악마’로 규정하며 설치를 성토했다. 이 토론회에서 한라산 케이블카 타당성 용역회사인 스카이레일사(호주)가 자국에 설치한 케이블카에 대해 소개했다. 이 소개에 의하면 “케이블카는 친환경시설이며, 호주에 설치한 케이블카 구간에는 화장실이나 각종 장비에서 나오는 오수나 녹물 한 방울도 철저히 관리하는 한편, 특히 수익성이 높은 식당이나 자판기도 환경오염 우려가 있어 일체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용역보고서를 보면 온갖 편의시설이 다 들어가 있다. “한라산에는 식당, 식품점, 간이매점 등을 설치하는 이유가 뭐냐? 남의 나라는 환경이 어떻게 되든 돈만 벌면 된다는 이야기냐? 그런 마음자세라면 다시는 대한민국에 오지 마십시오”라고 진창기는 일갈했다.

2000년 12월3일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를 위한 시민단체 대표들이 모여 한라산케이블카반대제주도민연대(상임공동대표 안흥찬·광조·조성윤)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제주도민연대에는 제주도산악연맹, 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서귀포문화사업회, 오름오름, 예래환경연구회, 자연보전협회 제주도지부, 전국교직원노조 제주도지부, 전국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 재경제주사회문제협의회, 제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제주문화포럼오름기행팀, 제주4·3연구소, 제주생태사진연구회, 제주여민회, 제주자생식물동호회, 제주주민자치연대, 제주환경연구센터, 제주환경운동연합, 제주흥사단, 참여자치와환경보전을위한제주범도민회, 한라산지킴이, 한라산케이블카반대제주범불교대책위원회 등이 참가해 제주도제 실시 후 가장 많은 시민단체 연대가 아닌가 싶다.

제주도내 초·중·고등학교 교가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은 한라산이다. 제주도내 교가에는 ‘수려한 한라산(형상)’이나 ‘정기’ 또는 ‘혼’이란 말을 집어넣어야 교가가 된다. 이러한 한라산에 쇠말뚝을 박아야하는 케이블카를 성판악(동쪽), 어리목(북쪽), 영실(서쪽)쪽에 설치하겠다고 했다가 실패했다. 물론 영실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꺼져가는 불씨다. 순서대로라면 다음에는 남쪽(서귀포)에 설치하겠다고 할 차례인 것 같다.

차라리 내가 신청했다가 실패하여 영원히 한라산에 케이블카 설치란 말이 사라지게 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노망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천 년 전에 일어났던 한라산 화산폭발이 재연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아름다운 케이블카’로 시작하는 교가는 안 나올른지.<계속>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출처: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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