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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 산

한라산등반사

1946년 국내 최초 동계 등정…80년대 들어 등반객 증가

◇ 화구벽으로 향하고 있는 이 원정대는 ’86년 3월 3명의 대원이 K2 정상에 올랐다. 사진 고길홍.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한라산은 휴전선 아래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느라 출입을 금하던 35년간으로도 부족해 1948년 4·3사건 이후 6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라산에서 적설기 조난사고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인지 1961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산악구조대가 발족되었으며, 최근에는 해외 원정을 위한 설상훈련지로 필수 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1977년 9월 15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 고상돈을 키워낸 것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제주와 한라산은 우리 등반사에서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조선시대~일제시대

한라산에 누가 맨 먼저 올랐는지, 정상까지 처음 가 닿은 사람은 누구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문헌으로 남겨진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면 1520년에 제주로 유배온 충암 김정이 그 이듬해 한라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며, 17세기에 이르러 김상헌의 <남사록>, 이건의 <제주풍토록>, 이원진의 <탐라지> 등에서 한라산에 올랐다는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1702년 이형상 제주목사의 등반기, 1841년 이원조 제주목사의 등반기가 있으며, 1875년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제주 선비 이기온과 함께 한라산을 등정했다고 전해온다.
제주를 대륙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일제시대에는 일반인에게 한라산 등반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그 당시 한라산에 오른 것은 대부분 일본인들로 1935년 2월 일본인에 의해 관음사 등산로에 개미등 소옥이 건립되어 한라산 대피소 제1호가 되었다.
1935년 12월~1936년 1월 사이 경성제대산악부 9명이 적설기 한라산 등반을 하던 중 1936년 1월 3일 마에가와 도시하루가 실종 동사하여 첫 한라산 조난이 되며, 이 등반은 한라산 동계 초등으로 기록된다.

 

해방기~1960년대

한국인 최초의 한라산 동계 등정은 10년이 더 지난 1946년 2월 한국산악회 적설기 한라산 등반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즈음에는 제주농업중학교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산발적으로 한라산을 등산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948년에 발생한 4·3사건으로 인해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 남짓 한라산 입산은 철저히 통제된다.
입산통제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종휴·안흥찬·김종철씨 등 몇몇 산악인들이 간간이 산행을 했다고는 하나 미리 관계당국의 허락을 받은 후 무장경찰이 직접 동행할 정도로 엄격했다.
1954년 한라산 입산 통제가 풀리면서 1956년 신성여고와 제주여고 학생들이 교사의 인솔로 오늘날 등산 형식으로 등반을 시작하였으며, 한라산 등반객이 점차 늘어나고 각종 조난사고가 빈번하자 조난구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1961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산악구조대인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가 발족되기도 했다.
1964년 제주도에 처음으로 제주산악회가 창립되었고, 1967년에는 한라산우회·오현고등학교 산악부가 설립되었다. 1968년 국토종주삼천리 행사를 제주 마라도에서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대한산악연맹으로부터 가입 권유를 받고, 이듬해 대한산악연맹에 정식으로 가맹하여 초대 회장으로 안흥찬씨를 선임하기에 이른다.

 

1970~1980년대

1970년대 초 서귀포산악회(1970년)·한국설암산악회(1972년)·서귀포 백록산악회(1973년) 등이 설립되면서 제주의 산악활동이 점차 활발해진다. 한라산 등반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1980년대에 제주도내 산악계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무수천 광령계곡에 여러 개의 코스를 가진 암장을 개척하면서 스포츠 클라이밍의 보급이 확산된다.
이 즈음 한라산에서의 적설기 등반훈련이 활발해지면서 타 시도 연맹과의 교류뿐 아니라 본격적인 해외원정등반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1982년 안나푸르나 트레킹(제주대 산악부 김성택), 1984년 일본 북알프스 등정(서귀포 백록산악회) 외에 1985년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정용선·오현등고회), 198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서봉준·오현등고회), 1986년 K2 등반(배종원·백록산악회) 등 전국 규모의 원정대에 제주 지역 산악인이 참가한 것은 80년대 제주 산악계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85년에는 제주 출신의 산악인 故 고상돈을 추모하기 위해 고상돈기념사업회가 설립된다.

 

 ◇ 장구목 바위에는 1992년 매킨리 등반 도중 실족사한 양영수·진성종·홍석탁 대원의 넋을

기리는 추모동판이 걸려있다. 사진 정수정.

 

90년대 이후 해외원정 활발해져

1990년대는 제주 산악인들이 본격적으로 해외원정등반에 참여한 시기다.
특히 제주산악회는 1993년 칸텡그리 등정(김균)·에베레스트 등반(임희제), 1994년 매킨리 등반(고성홍·전양호·문용성)을 이어가며 단위 산악회로서 쉽지 않은 행보를 지속한다. 그러나 1992년 제주대 산악부 매킨리 원정대가 등반 도중 양영수·진성종·홍성탁 대원이 실족사하는 대형 조난사고가 발생한 데다 같은 해 한국설암산악회 동계 랑탕리룽원정대 김진현 대원이 하산 도중 추락사하여 산악계에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1999년에는 제주도산악연맹 차원에서 꾸린 최초의 해외원정대 ’99 한국초오유원정대(원정대장 박훈규 외 7명)가 초오유 등정에 성공한다.
그 행보를 꾸준히 이어 2002년에는 제주 산남지역 3개 산악회(서귀포 백록산악회·영천산악회·거산회) 합동등반대인 2002 제주안나푸르나1봉 원정대가 출범하여 5월 15일 오희준 대장이 등정에 성공한다. 이로써 제주산악연맹은 자체의 힘으로 8000m급 등반을 연이어 성공시킨 쾌거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그밖에도 2001년에는 강성규(제주대 OB산악회)·오희준(서귀포 영천산악회)·김형우(한국설암산악회)씨가 로체·K2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2002년에는 제주대 산악회(원정대장 오문필 외 5명)가 매킨리 원정을 성공시킨다.

 

적설기 한라산 조난사

한라산은 설악산과 더불어 적설기 조난사고가 많은 곳이다.
1936년 1월 3일 탐라계곡에서 적설기 훈련 중에 경성제대 마에가와 도시하루가 동사한 것을 시작으로 끊이지 않고 조난사고가 기록되었다.
전체적인 한라산 조난사고는 등산관광객이 집중되는 봄과 여름 사이에 많은 편이나 1995년 이후 겨울 등산을 선호하는 일반 등산인구가 증가하면서 이에 따른 조난 발생 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전문 산악인들의 한라산 조난사고는 철저하게 겨울철에 편중되어 있다.
이는 대부분의 전문 산악인들이 한라산을 겨울철 설상훈련지로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큰 조난으로는 2001년 2월 제주도 대학합동등반대 훈련 도중 3명이 장구목에서 눈사태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출처 : 월간[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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