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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 산

한라산 산신을 찾아서

와흘리 본향당~화천사 오불여래~산천단

◇ 와흘리 본향당의 신목. 이 장엄한 생명력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신과도 소통할 가슴이 없어 보인다.

 

산도 인연이 중요하다. 어떤 풍경도 산과 함께 한 사람의 인연보다 강렬한 것은 없다.
한라산의 첫 인연은 가슴 아팠다. 스무 살 때 한 사람의 노래 속에서 교과서 밖 한라산을 처음 만났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초상집도 아닌데 남자가 그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라
아! 반역에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나는 사람을 울게 하는 그 산이 무서웠다.

 

마을에 내려온 산, 와흘리 본향당

무릎까지 빠지는 겨울 한라산에서 다리가 욱신거리도록 걷고 또 걸었다.
눈보라 때문인가.
산은 초행자에게 좀체 속내를 열어주지 않았다.
산을 내려왔지만 여전히 산으로 가는 길이 궁금했다. 그러나 길은 산에만 있지 않았다. 제주사람 강정효씨는 사람의 마을 속에 내려앉은 산으로 안내했다.
제주사람들은 평생 신들과 함께 산다. 1년에 천만 명 가까이 제주공항을 드나드는 요즘도,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섬을 만들고 지킨 신들과의 교감이다.
뭍사람들은 신구간이란 특별한 이사 전통만 보아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상의 모든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사이, 대한 지난 5일째부터 입춘 전 3일까지 일주일 동안 섬 전체가 들썩인다. 이때 이사나 집수리를 해야 액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스안전공사에서는 24시간 비상근무체계에 돌입하고, 한국통신도 휴일 없이 연장 근무를 한다. 뭍에서 고가사다리차가 제주도 원정을 나가 짭짤하게 주머니를 불릴 정도다.
집집마다 부엌의 조왕신, 대문의 문전신, 화장실의 칙도부인까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이런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면 그곳에는 으레 본향당(本鄕堂)이 있기 마련이다.
섬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조천읍 와흘리 본향당. 강정효씨는 제주 신들의 어머니를 찾자면 송당리 본향당을 찾는 것이 순서지만 뭍사람들에게는 이곳이 낫다고 했다. 크고 화려한 것 아니면 제대로 깊이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여행객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안다는 듯 말이다.
검은 돌담 한쪽에 제주(祭酒)로 쓴 막걸리 병이 탑처럼 쌓여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종종 신들도 취하고 싶은 세상이라고 경망한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팽나무 두 그루가 턱 하니 가슴을 막는다. 700년은 넘었다는데 그런 인간의 셈법은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인다.
이 장엄한 생명력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신과도 소통할 가슴이 없어 보인다. 불끈불끈 굽이치듯 뻗어나간 가지마다 물색이 드리워졌고, 군데군데 마른 북어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채 꽂혀있다. 이상하게도 자꾸 굳어버린 북어의 눈동자와 눈을 맞추게 된다. 명태는 알았을까.
대양의 푸른 물살 가르던 몸뚱이가 거대한 신목에 매달려 나무토막보다 더 빳빳하게 굳어있게 될 줄을. 파도소리 대신 아우성 같은 사람의 기도를 전하는 메신저가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는 최승호의 시도 생각났다.
본향당 신목은 어른 가슴 높이의 돌담 안에 모셔져 있다. 사나운 바람을 체로 거르듯 잘게 부순다는 제주의 돌담, 한 맺힌 사람도 저 담을 넘어가면 바람처럼 유순해졌을까. 돌담 안 신궁 같은 팽나무 그늘 속에서 실컷 한풀이를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깃털처럼 가벼워졌을까.
이곳에선 무엇이든 소원을 빌어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마법에 걸리는 것 같다. 나의 기도는… 볕이 좋은 날, 이 커다란 그늘 아래 그저 오래 앉아만 있고 싶은 것이다.

 

 ◇ 화천사 오불여래. 검은 현무암 위에 투박하게 새겨진 미륵불은

 오랜 세월 섬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인 소탈한 신의 얼굴이다.

 

긍휼한 마음의 미소, 화천사 오불여래

새미마을 화천사 뒤뜰에서는 숨겨진 제주의 얼굴을 만났다.
진초록 이끼 옷을 입은 검은 현무암 오불여래는 절로 마음을 열게 한다. 내려다보아선 알 수 없다. 무릎을 꿇고 돌부처와 눈을 맞추어야한다. 어느 것 하나 꼭 같은 표정은 없다.
제주하면 떠오르는 왕방울 눈에 주먹코를 가진 돌하르방, 이미 상품화된 낯익은 얼굴로는 느낄 수 없는 미소가 있다.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고 싶게 만드는 얼굴.
제주 말씨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서울에서 통화를 하는 사람마다 참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다.
혹 무슨 결례라도 한 게 아닐까 염려하며 수화기를 내려놓게 만들던 사람들이 막상 섬에서 만나보니 그렇게들 편안할 수가 없었다. 돌하르방에 움찔했던 얼굴이 오불여래의 미소로 금세 펴진 것처럼 말이다.
섬에 내려오기 전 쓰나미 때문에 동남아시아가 발칵 뒤집혔다. 우리는 한산하던 겨울 제주가 북새통이겠구나 생각했다. “남이 아픈데 대고 제주로 오라고 열을 올려 홍보할 순 없지요.” 첫날 제주관광협회에서 만난 사람의 첫마디가 어떤 달변보다 강렬하게 이 섬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게 제주의 마음이구나…. 많이 아파 본 사람이 긍휼한 마음도 깊은 법이다. 돌 위에 새겨진 투박한 신들의 얼굴 역시 그런 마음으로 섬사람들을 다독였을 것이다.
화천사 돌담을 지나 한길가로 나가기 전, 길 아래 동회천 샘물이 있다.
섬 전체에 괴질이 번질 때도 이 물을 먹는 사람들은 병마를 피해갔다는 신령한 물이다.
이끼 낀 돌우물 속에 부유물을 걸러 조심스레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순전히 기자 정신 때문에 입을 댔다. 그러나 몰래 샘 밖으로 나와 도로 뱉을 수밖에 없었다. 신성한 샘물을 모독했다고 벌을 받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강정효씨는 지금은 농업용수로만 쓴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해준다. 더 이상 용천수가 솟는 해안가 샘을 따라 사람이 모여 살던 그 옛날의 제주가 아니다.
삼다수를 뭍으로 내다 팔 정도로 지하수가 풍부한 섬, 제주에선 겨우내 한라산에 쌓인 눈이 화산회토라는 천연 필터를 뚫고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섬사람들의 수도꼭지로 쏟아진다. 신의 뜻에 따라 샘이 솟던 것 대신 수자원공사의 손에 의해 물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신과 소통하는 숲, 산천단

 

백록담 정상에서 치러지던 산신제가 제주시 아라1동 산천단으로 내려온 것은 1470년 이약동 목사가 부임한 다음부터다.
한라산 정상까지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가죽신에 비단 누비옷 입고 가마에 앉아 산을 올랐을 양반들이, 무명저고리에 짐승의 맨발이나 다름없었을 짐꾼들의 언 발로 끌어올린 제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기도를 듣는 산신은 만족했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복을 비는 제사를 위해 산 사람이 얼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그 제사를 산 밑으로 끌어내린 이가 바로 낮은 데로 임하는 신이 아닐까.
산천단은 거대한 공룡 같은 곰솔 그늘 아래 있다.
모두가 500~600년 이상이라니 한라산 산마루에서 기슭으로 내려온 산신제를 처음부터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때 여기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뿜어내던 숨을 이 나무들이 들이마셨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소나무 숲이 들이키고 내뿜기를 거듭하던 대기는 오늘 내 폐 속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다. 이약동 목사가 들이마신 산소의 일부가 내 몸 속에도 이미 들어왔을 것이다.
내 피와 살이 되었다가 다시 나무의 수액이 되고 이파리가 되고…. 생명은 그렇게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길은 다시 산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관음사에 들렀다. 1949년 2월 한라산으로 쫓겨 간 유격대와 토벌대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불타버린 절.
당시 대웅전에 있던 300년 된 나무불상에 불이 붙자, 격노한 신은 한순간 ‘펑’ 하고 터져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절대 불에 탈 일이 없어 보이는 돌부처들이 길옆으로 줄지어 서있다. 무릎께로 눈 이불을 덮고 일주문까지 안내하는 불상들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지금껏 섬에서 만난 신들의 형상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정제된 모습이다. 그렇지만 너무 비싼 옷으로 치장을 한 탓일까. 이런 데 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때문일까. 좀체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법당 대신 곧장 질척이는 눈밭 사이 숲으로 향했다. 경내 입구에 4·3유적지라는 초라한 푯말이 먼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눈에 덮여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들다. 스패츠를 푼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눈밭을 걸어 들어가니, 화산석 돌담으로 몸을 가린 채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을 법한 진지들이 보였다.
구멍 뚫린 돌멩이, 가리는 만큼 틈도 많은 돌담, 사람들 가슴에 뚫렸을 총구멍…. 그 모든 구멍들 사이로 바람이 사납게 지나간다. 몸도 마음도 춥다.
관음사 휴게소에서 보히차로 언 몸을 녹였다.
차를 마신 세월이 그대로 얼룩이 되어 남은 연륜 있는 잔 그리고 사모기(벚나무의 제주말) 로 만들었다는 나이테가 드러난 잔 받침이 마음에 들었다.
“직접 만드셨어요?”
“아니요, 나는 자르기만 했고 만들긴 산이 만들었죠.”
얼마 전까지 윗세오름 대피소에 있었다는 진용진씨의 말이다. 우리가 무엇 하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사물을 온전히 새롭게 만든 것이 있을까.
그저 다른 생명에 의지해 조금 힘을 보탰을 뿐이다. 섬에는 그걸 잊지 않고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한라산을 노래하며 울던 그 사람은 너무 이른 나이에 섬으로 돌아갔다. 뭍의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에서 일렁이는 제주바다를 보았다. 이제는 그가 수평선을 넘어 뭍에서 보낸 시간보다 한라산이 보이는 산담 안에 누워 있는 시간이 더 오래 되었다. 제주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처럼 그를 낳고 보살피던 본향의 신들 곁에 누운 것이 아주 익숙해졌을 만큼.
해거름이 되자 한라산 산그늘이 마을의 돌담 위로 내려앉는다.
이제야 그 산이 뭍사람 가슴속에도 푸근하게 들어온다. 제주에선 산이 신이고 신이 또 섬이다.

◇ 이약동 목사가 백록담에서 치르던 산신제를 산 아래로 옮긴 산천단.

 

INFORMATION
애흘리 본향당·화천사 오불여래·산천단 길잡이


‘절에 가듯 당에 가고 당에 가듯 절에 간다’는 제주사람들의 민간신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적인 본향당은 와흘리 하로산당이다. 조천읍 와흘리로 가는 16번 도로변에 신목인 팽나무 두 그루를 감싼 돌담이 있다.
‘노늘산신또’와 ‘하로산또’ 부부 신을 모시는 당으로 지금도 1월 14일 신과세제와 7월 14일 백중마불림제라는 큰 마을 굿을 치른다.
화천사 오불여래는 제주시 회천동 화천사(064-721-2755) 뒤뜰에 있는데, 제주시에서 와흘리 본향당을 찾아 가는 길에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원래 5개의 미륵불만 있던 곳에 절이 들어섰고, 유교 전통의 마을제까지 이곳에서 치러진다. 화천사 가는 길가에 있는 천미물(새미물)이란 옛 우물도 있다.
산천단은 제주시에서 5·16도로로 올라가면서 길이 1차선으로 좁아지는 곳에 있는 검문소에서 오른편으로 20여m를 들어간다. 천연기념물 160호인 곰솔 숲의 짙은 그늘 속에 산천단과 백록담 산신제를 이곳으로 끌어 내린 이약동 목사가 건립한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禪碑)’가 세워져 있다.
500~600년 된 곰솔 8그루가 신령한 기운을 뿜어내는 숲이 인상적이다.

 

출처 : 월간[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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